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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이콜로지스트 Mar 13. 2024

제1장 어떤, 일하는 엄마의 아이

5. 초록별의 교훈

초등학령기에 절대 학원을 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은 자의 반 타의 반 어느 정도 잘 지켜지고 있었다. 일단 정신건강 전문의의 책을 통해 아이에게 너무일찍 문제집을 풀리는 것이 그저 유리잔에 물을 가득 부으려는 행위라는 것에 동의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유리잔에 물을 가득 부으려는 노력보다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참으로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연산능력만 억지로 끌어올리는 것에 반감도 있었지만 사실 체크할 시간도 에너지도, 학원에 보낼 여유도 없었다.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힘"이었지 "계산하는 힘"이 아니라는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었기에 다른 집 아이들 다 한다는 학습지에 마음이 동한 적은 없었다. 그저 학교 수업과 과제에 충실한 정도로만 지도하려고 했다. 


아이는 수에 관심이 많았고 글로 수학을 풀어내는 재능이 있었지만... 하하하 수학단원평가 점수는 대부분 겸손했다. 보기 3번에 동그라미를 치고 답은 2라고 표기하던가, 4x6=28로 계산하던가, 뒷장을 확인하지 못하고 안 푼 채 제출한다던가 하는 크고 작은 실수들은 고학년에 올라가니 좀 더 심해졌다. 대책도, 타협도 필요했다.  아무래도 연산은 연습이지.  


그렇다면 배운 대로, 평소 고민하던 대로 지도해 보자. 가장 얇은 문제집을 사고, 아이가 풀고 나면 빨간색대신 초록의 색연필을 사용하자. 그리고 맞은 것에는 큰 동그라미 틀린 문제에는 작은 별을 그려주자. 이만하면 철학 있는 괜찮은 엄마 아닌가.  문제집을 풀게 하자 아이는 의외로 흥미로워했다. 푸는재미에 골몰하는 모습도 꽤 귀여웠다. 


그렇지만 채점을 하면서는 다른 감정이 일렁거렸다.  계산실수는 가히 염려되는 수준이라 심란하기도 했었다. 어쩐대... 결국 학원인건가... 하지만 나는 우아하게 초록 색연필로 동그라미는 크게, 오답에는 작은 별을 그려 넣으며 고단한 마음을 잘 추슬러내는  내가 얼마나 괜찮은 엄마인지 스스로에게 강조하고 있었다. 


채점을 마칠 즈음 아이가 달려와 문제집을 손으로 덮으며 말했다.  “엄마 나는 이제 엄마랑 공부를 안 할 거예요.” 


응? 뭐지? 너와 나의 공부는 시작도 안 했는데? 공부도 아니고 그냥 문제집 채점일 뿐인데? 

“엄마는 내가 이렇게 동그라미가 많은데 별표를 치면서 인상을 써요. 내가 기분이 나빠져서 이제는 안 하고 싶어요.”  


아뿔싸. 아이는 엄마의 표정을 살핀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옳은 말이다. 동그라미가 이렇게 많은데 엄마는 왜 별표를 치면서 그렇게 찡그렸을까. 우아한 척 손으로는 별을 그리면서 실상은 불안한 마음으로 빗살무늬 토기를 그리고 있던 게지. ‘도대체 이 쉬운 문제를 왜 틀릴까?’ 하는 비난의 ‘마음 말’은 표정으로 새어 나와 아이가 마음으로 듣게 된 것이다. 엄마의 무의식적 행동은 아이에게 죄책감이든 좌절감이든 불쾌한 감정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결국 나는 엄마의 마음으로 까다롭게 고른, 초록별로 아이를 비난한 것이다. 100점이 아니어서... 이 과정이 아이의 수학역량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평가가 될 수 있었다는 자기검열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덮어놓고 아니라고 하면 이 또한 아이의 관찰과 판단을 부정하는 것. 그래 네 말이 맞다. 엄마가 미안. 동그라미가 이렇게 많은데... 실수는 잘못이 아닌걸... 엄마가 오늘 또 하나 배웠구나. 

 

부모는 의도를 보여주고자 하지만 자녀는 부모의 태도를 본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가슴에 박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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