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도시와 시골, 그 어느 중간을 찾기 전에 내가 꿈꾸는 시골 살이는 어떠한 지 찾아보고자 한다. 그래서 첫 번째로 나에게 물음을 던져보겠다.
왜 시골살이가 하고 싶을까?
나의 집을 예쁘게 꾸미고 살고 싶다
건강한 음식을 먹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
사람들과 더 이상 부딪히고 싶지 않다
앞서 나열한 ‘듦’을 의식주 위주로 간추려보았다.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것조차 ‘가성비’를 따지는 나를 인정하면서 말이다.
나의 집을 예쁘게 꾸미고 살고 싶다
도심에서 열심히 일하는 청춘들, 이제는 내 집 마련을 포기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집값을 이제는 주식이라도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다들 코인을 굴리고 있지 않은 가?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반포 자이 아파트가 아니라 반포기 시골 라이프인 것이다. 그저 꿩 대신 닭이라고 전월세 집에서 예쁘게, 그럴싸하게, 사람답게 꾸미고 살고 싶은 마음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 쉬울까? 샷시에 구멍조차 내지 못하는 자취생의 니즈를 발견하고 뚫지 않고 커튼을 거는 ‘안뚫어고리’ 브라켓이 나와버렸으니 말 다 했겠다. 이런 디자인 소품을 잘 활용하여 잘 살고 있다 하여도 원룸에서 투룸으로 전세에서 내 집으로 옮기고 싶은 내 마음은 여전히 굴뚝같다.
건강한 음식을 먹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
1인 가구가 매일 같이 밥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예상이 될까? 웬만큼 자취 만렙 아닌 사람은 밥을 미리 해서 냉동실에 얼리는 수고스러움을 선택하지 않는다. 밥솥을 보온 설정해두었다가 깜빡하고 뚜껑을 열면 쌀알은 이미 원시 시대로 돌아가 화석이 되어있을 것이다. 보통 해두었던 반찬과 밥은 시간이 지나 음식물 쓰레기통 행이다.(심지어 자취방 냉장고도 참 작고 먹어줄 사람도 없다) 출근 시간은 어떨까? 아침잠이 많은 사람은 밥 대신 잠을 선택할 것이고, 이제는 밥심으로 움직이는 내 나이대 사람들은 맥모닝을 사들고 출근할 것이다. 점심도 사 먹을 것이고 힘 빠진 직장인은 퇴근하고 나서 밥 해먹을 여력이 없다. 그래서 결국 배달 어플을 키는 것이다. 언택트 시대가 열린 덕에 라이더스도 하나의 직업으로 자리 잡혔다지만, 밥 해먹을 시간(힘) 없는 현대인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과 더 이상 부딪히고 싶지 않다
건강한 음식과 깨끗한 공기의 연장선이다. 매일 출근하면서 좋지 않은 지하철 공기를 실컷 마신다. 그것도 모자라 초미세먼지와 황사가 덮치는 날엔 정말 곤욕이다.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이미 마스크는 초밀착 생필품이었다. 게다가 너도나도 어깨를 맞대며 출근하는 지하철은 그냥 내가 샌드위치가 돼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니, 햄버거가 나을까? 자리도 없는데 꾸역꾸역 들어오려는 아줌마, 아저씨를 볼 때면 그러려니 하는 너그러움은 이미 개나 준지 오래이다. 출근하고 나서는 어떨까. 이미 출근길에 된통 전쟁을 치르고 왔는데 또 회사에서 전쟁을 치루어야 한다. 나의 외형에는 왜들 그리 관심이 많은지. “화장이 떴네. 어제 피곤했나 봐?”, “어제 입은 옷 또 입고 왔네. 집에 안 들어갔어?”
마음대로 벽에 구멍 뚫지도 못해서 ‘안뚫어고리 커튼봉’을 검색해야 하고, 제대로 끼니를 채우지 못해 먹기 위해 사는 건지 살기 위해 먹는 건지 모르겠고, 그냥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을 뿐인데 그 어깨는 왜 내가 다 맞는 건지. 검색해야 하는 노력이 들어가고, 먹기 위한 노력이 들어가고, 출근하기 위한 노력이 들어가고. 도시에 사는 나는 이렇게나 많은 ‘듦’이 필요하다. 이것 아니어도 나는 충분히 힘든데 말이다.
어떻게 살고 싶은데?
왜 시골살이를 하고 싶은지 배경이 나왔으니 어떻게가 중요하겠다. 사실 긴 말이 필요할까? 딱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오는 혜원이네 집이 내 집이었으면 좋겠다. 이 영화만 몇 번을 봤는지 모르겠지만, 주인공 혜원이와 나의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기에 어느 정도 감정이입이 됐던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남이 잘 되는 꼴을 쿨하게 축하해주지 못하는 나의 마음 그릇을 힘듦으로 포장하여 시골에 도피하고 싶을지도.
사계절을 담은 아름다운 시골 풍경도 있겠지만, 리틀 포레스트에 나오는 그 집이 딱 내가 살기에 알맞은 집 같았다. 적당한 크기의 마당과 텃밭, 적당한 크기의 방 구조, 적당한 크기의 주방 등. 그리고 여전히 시골에 남아있는 고향 친구와 고모까지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혼자 지냈어도 적당히 케어가 가능한 규모를 영화를 통해 가성비를 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