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반적으로 미련이 넘쳐흐르는 타입이어서 사람이든 물건이든 조금이라도 좋은 구석이 있으면 웬만해서는 내치지 못했다. 사진을 지우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이 사진은 나름의 추억이 있고, 이 사진은 웃기고, 이 사진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고, 뭐 이런 시답잖은 이유들로 비슷한 사진을 갤러리에 수십 장씩 저장해 두었다. 사실 귀찮아서 정리를 잘 안 한 탓도 있었겠지만 막상 정리하려고 해도 아까운 마음이 들었던 탓이 컸다.
물건들을 정리하고 디지털 디톡스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만장이 넘어가는 갤러리 속 사진에 눈이 갔다. 몇 차례 컴퓨터에 옮기고 정리한 적도 있었지만 새롭게 쌓이는 사진들은 언제나 무섭게 불어났다. 그중 딱히 마음에 드는 사진도 없었다. 그럼 적어도 핸드폰에는 마음에 드는 사진만 남겨보자 생각하고 정리를 시작했다. 필요 없는 사진을 지우는데도 구질구질하게 굴까 봐 좋아하는 사진을 먼저 골라놓고 나머지는 전부 지웠다. 만장 가까웠던 사진이 천장 남짓으로 줄었다. 그와 함께 미련의 크기도 줄어들었다. 사진이 전부 지워져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전에는 사진첩의 일정 구간이 날아가기만 해도 너무 속상하고 상실감이 컸는데, 지금은 갤러리에 있는 모든 사진들이 지워져도 조금 안타까울 뿐 그렇게까지 괴로울 것 같지는 않다.
만약 내게 가장 소중한 사진 하나를 뽑으라고 한다면 아주 예전에 인화한 가족사진을 고를 것이다. 우리 가족 중 한 명도 빠진 사람이 없는 몇 안 되는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사진마저 사라진다면, 나는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며 잊을 생각이다. 어차피 소중한 기억은 지니려는 노력도 할 필요 없이 내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 무언가를 잊게 된다면 그건 지워져도 괜찮은 정도의 기억일 것이다.
왜 가끔씩 사진첩 속 추억여행을 하고 싶어 질 때가 있지 않나. 나는 그럴 때면 마치 방청소를 시작해 놓고 갖은 물건과 어릴 적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오랫동안 그 속에 빠져있곤 했다. 그러나 잊어버린 기억들을 반드시 되짚어볼 필요는 없었다. 향수병은 미련을 남기기도 하고, 가끔씩은 그 시절의 내가 부끄러워져 이불을 걷어차는 쓸데없는 짓을 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미련이 많을수록 괴로움은 짙어진다. 사람도 물건도, 모든 것은 언젠가 결국 사라진다.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의 물건을 붙잡고 있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시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상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건을 통해서라도 위로받고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그러니 물건을 정리하는 건 마음이 정리된 후에 해도 충분하다.
사진을 정리한 후 중고 필름카메라를 한 대 샀다. 굳이 짐을 더 늘리면서까지 구식 카메라를 산 이유는 내 시선에 담는 것들과 그 순간을 더 소중히 여기고 싶어서다. 필름 값이 아까워서라도 한 컷 한 컷 진심을 다해 촬영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찍히고 지워지는 사진들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다. 사진을 오래도록 남기는 것보다 촬영하고 인화하는 순간의 기억, 그 자체를 즐기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