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을까. 5개월만에 돌아온 한국에는 미세먼지가 잔뜩 껴서 하늘이 뿌옇다.
침대에 누워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두 손으로 종잇장을 잡고 넘기며 읽어보고 싶었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읽기. (미국에서는 한국책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늘상 아이패드로 책을 읽곤 했다.) 두꺼워서 잡고 있다보면 어깨죽지가 아파오는 책이지만 여행 내내, 미국에 있던 내내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었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느낌. 내가 가져왔던 많은 ‘믿음’들에 대한 변화.
대표적인 예로 무엇이 있을까. 첫 번째로 알아차린 일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허황된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했던 ‘자존감’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항상 입고 있던 옷은 그 불편함과 존재를 자각하기 전까지는 그를 입고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다. 가령 내가 입고 있던 옷들이 그랬다. 진정한 자존감은 자기 스스로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내가 가지고 있던 못났던 면과, 과거의 죄를 인정하고 직시한 순간부터 서서히 생겨났다. 가짜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온전히 만족하고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대부분은 스스로에 대한 대단한 만족감과 고양에 차 있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타인과의 끝없는 비교를 통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갉아 먹는다. 자존감과 질투의 감정은 함께 존재할 수 없다. 이와 유사하게, 자존감과 타인의 관심과 인정에 대한 집착은 공존할 수 없다.
과거의 내가 반복했던 생활패턴 중 유일하게 물음표를 던져보지도 않고 숨쉬듯 해온 일이 있다. 바로 ‘타인이 생각하는 나’에 대해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 일련의 일들을 계기로 이에 대해 초연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아니었음을. 나는 끊임없이 나를 미워하는 누군가와, 사랑하는 누군가와 보이지 않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부모가 생각하는 ‘나’, 친구가 생각하는 ‘나’, 불특정 다수가 생각하는 ‘나’에 대해 견고한 성을 쌓기 위해 실제 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감정과 행동을 연기했다. 이 과정은 아주 치밀하고 교묘했기에 나 스스로도 이것이 ‘연기’임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내가 어떻게 전시되고 나열되는지에 너무 많은 감정과 시간을 투자했다. 나는 나의 미술관을 찾아온 사람이 실망하지 않도록,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걸작들을 찾아 전시하고 그들이 보내는 박수갈채와 찬사에, 때로는 혹평에 목을 맸다. 전시작들 중 일부는 나였지만, 일부는 나의 아류작이었다. 실상 나는 나의 전시보다도 더 심오한 깊이와 넓이를 가진 존재였음에도, 내가 속해있던 세계를 위해 나를 가두었다. 그 그물은 내가 아주 어릴 적 이 곳에 태어난 순간부터 촘촘하게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내가 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내가 왜 이 사회에서 이런 길을 걸어야 하는지, 나의 생김새에 따른 의무와 권리는 무엇인지, 혹은 실제로 그것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 또 달리 태동한 종교는 아닐지, 내가 왜 다른 동물과 식물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시스템으로 설정된 것인지, 혹은 그게 내가 선택해서 정한 시스템은 아닌지, 내가 가진 믿음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생각해볼 충분한 여유와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물 속에서의 시간은 오로지 한 곳만 바라볼 수 있도록 흘러갔다. 시선을 한 쪽으로 고정시킨 채로 묶여버린 머리처럼, 우리는 대부분이 그렇게 누군가가 정해준 정답을 향해 걷도록 설계된 무엇이었다.
무엇에 대한 정의는 쉽게 내리지 못하겠다. 다만 나는 내가 우후죽순 생겨나는 ‘사진찍기용’ 전시회 같았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잠시 앞에 멈춰 서서 몇 분간 수없이 많은 사진을 찍고 기준에 도달하는 어떤 사진을 건지면 바로 가치 충족이 끝나는 그런 전시회 말이다. 나는 외적으로 보여지는 껍데기에 대한 무서운 집착이 있었다. 그건 외관이 어떤지에 따라 사람의 급이 다르게 환산되는 이 사회의 압박감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나의 맨 얼굴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 부끄러웠다.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가, 검은색의 동공이, 거친 피부가, 망가진 발톱과 굳은 살이 박힌 발이, 몸 곳곳에서 자라는 털들이, 작은 가슴이, 큰 코와 크기가 다른 눈이 싫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언제나 ‘정답’으로 통하는 크고 예쁜 눈과, 하얗고 티없는 피부, 크고 풍만한 가슴과 더 도톰한 입술, 얇고 높은 코, 곡선으로 떨어지는 이마와 결이 아름다운 일자 눈썹을 가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수없이 많은 사진을 찍고, 그 사진들을 밤을 새워가며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편집하고, 편집된 또 다른 가상의 나를 가상의 공간에 전시하고, 그렇게 나의 아바타를 공고히 함으로서 나의 갈증을 채웠다. 내가 핸드폰 속에 들어있는 수 만장의 사진들을 바라만 보는 이유는, 내가 그 사진을 그 전시장에 풀기로 하는 순간에 나는 습관적으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쫓고 있는 사람이, 그 가상 전시회에는 너무나도 많았다.
앞다투어 생겨나는 전시회는 우리를 가두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조각조각 잘라내어 보기 좋은 것만 골라 나열한 다음 전시했다. 그 중에 골라지지 않은 것은 기억 저 편으로 잊혀지기도 하고, 선택받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 먼지가 뽀얗게 앉도록 쌓여갔다. 사람들은 살다가 마음 속에 걱정이나 불안이 생기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위로를 받으며 그를 헤쳐나갈 힘을 얻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작은 기계 속 가상 현실에 매몰되어 파란 버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올리는 삶의 편집된 조각들과 붉은 하트, 숫자로 나타나는 가짜 사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발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맨 얼굴로 달려나가 알몸인 상태로 유유히 물 속을 헤엄쳤다. 나의 몸을, 곡선의 화음을 훑고 지나가는 물의 움직임이 좋았다. 세상에 처음으로 태동하던 시작점처럼 자유로워진 순간이었다. 일렁이는 물결을 따라 쏟아지는 햇살이, 유리같이 빛나는 눈부신 빛을 받아 타는 내 살갗이 좋았다. 그 해 여름, 한 달간의 여행을 떠나며 구릿빛으로 그을리는 나의 피부가 처음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내가 온 세상을 누비며 받아들인 햇빛의 손길이 몸 곳곳에 남아있듯, 여행의 시간이 쌓인 보드라운 살결이 참 아름다웠다. 그러면서 내가 원래 가지고 태어난 이 얼굴도 좋아하게 되었다. 딱히 계기랄 것은 없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의 우주를 담기에 내 스스로가 충분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전시회를 떠나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부터 전시회의 문을 다시 연다.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들. 그 편집된 무대의 뒤편 그늘에 있던 날 것의 이야기들을 시작하려고 한다. 연꽃이 피어나던 못 속의 진흙을 한 줌 가득 퍼내어 보이려고 한다. 목련 꽃이 피기 전에는 앙상한 겨울 나무의 기나긴 고독이 있었음을 말하려고 한다. 무대 뒤 먼지가 쌓인 채로 버려진 기억들을 꺼내기로 한다. 내가 가지고 있던 가장 밑바닥의 감정-패착과 끝없이 반복되던 고통-들을 기록하기로 한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에는 수없이 많은 모양의 마음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그래서 사랑은 여러가지 모양과 색을 지닌다. 한순간에 사랑이 증오의 바다에 잠식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과거에 내게 일어났던 불운한 일들을 이해하지만, 종잇장처럼 얄팍한 인간 감정의 나약함에 실망할 뿐이다. 잠들지 못하는 새벽에 사멸한 증오의 바다 속을 유영한다. 독서실 책상 앞에 붉은 색의 연필로 적어 놓았던 이름들을 떠올린다. 끝없는 원망과 고통 속에서 울부짖던 단장의 밤들을 기억한다. 나의 지난 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나는 오늘 밤 죽은 시간의 무덤 속을 헤엄치고 있다.
나는, 적어도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어. 나라고 무섭지 않은게 아니야. 똑같이 무서워. 남들이 다 걸어가고 있는 길에서 뛰쳐 나와서 보이지도 않는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무섭지 않겠어. 그래도 난 적어도 맞다고 생각하는 건 맞다고, 틀리다고 생각하는 건 틀리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어. 좀 다르고 낯설다고 해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용기내어 말한 진실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외면 당하고 배척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채 어른이 되기도 전에 삶이 무너질 만큼 끔찍한 일들을 겪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지금 걷는 이 길이 맞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어.
언젠가는 꺼내야 할 이야기다. 미루고 미뤄두던 내 인생의 숙제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을 언제, 어떻게 보여주느냐의 문제였다. 크고 깊은 상처라 아물고 나서도 끔찍한 흉터가 남았지만, 그 흉터 위에서도 이렇게 푸른 싹이 자라나 아름다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마치 메마른 바위 틈에서 피던 그 꽃처럼. 이제는 한 겹 포장된 필터를 벗겨내고, 조금 더 날 것의 나를 열어 보는 일. 중학교에서 시작해 고등학교, 대학교와 잠깐의 회사 생활을 거쳐 미국에 가기 전까지 내가 겪었던, 그리고 지켜보았던 모든 아픔에 대한 담담한 이야기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 위에서 피어난 새하얀 연꽃을, 겨울을 지나 봄에 홀로 피어난 목련꽃을 노래하고 싶다. 사라진 증오의 자리에 채워진 사랑을 꺼내 보이고 싶다. 내가 바라본 나와, 타인과 세상에 대한 투박한 스케치를 전시하고 싶다. 4년 전의 여름 고등학교를 나오던 날과, 자퇴 후의 기나긴 공백기와, 매일 나와의 싸움을 벌여야 했던 재수시기와, 공부와 일 그리고 끝없는 생각 속에 빠져 살던 대학교에서의 시간들. 그 모든 혼란 속에서도 찾아낸 행복의 순간들을 걸어 놓아야지. 어두운 그림자의 반대편에는 눈부신 빛이 언제나 있다는 아름다운 역설. 그 여명의 이야기를 오늘부터 시작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