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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원다인 Sep 28. 2021

"차 한잔 하고 가세요"

다담잡설(茶談雜說):차마시다떠오른별별 생각

마신 차: 연우제다 우홍. 3g, 95도, 40s-30s-40s-1m-1m30s


작년 이맘때, 온 세상에 역병은 창궐하고 세상살이가 어려워 산으로, 산으로 돌아다녔었다. 어쩌면 사람을 피해서 방황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인적 드문 산을 골라 여기저기 정신 나간 것처럼 쏘다녔었다.


하루는 험한 계곡을 타고 한참 산을 오르는 도중에 등산화 밑창이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신발 끈으로 묶어서 응급조치를 취했는데, 더 이상 등산이 어렵다는 판단이 들어 하산을 결정했다.


험한 계곡이라 어떻게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 지도상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사찰이 있어서 일단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암자가 아닌 큰 절이라면 응당 차가 통행 할 수 있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으리라는 추측이 들었다.


20분인가 30분 정도를 걸어서 도착했는데 다행히 생각보다도 큰 절이었다. 그런데 인적은 전혀 없고 고요하기만 했다. 불당을 돌아 내려와 공양간 앞을 지나는데 나이 드신 비구 스님 한 분이 창문을 닦고 계셨다.


"스님 여기서 하산하는 차도가 있나요?"

"저쪽으로 쭉 내려가세요. 한참을 가야 할 텐데..."


고요한 산사를 홀로 지키시는 게 외로우셨는지 스님은 몇 말씀을 더 건네셨다.


"혹시 불자세요?"

"아니요. 불자는 아닙니다"

"상관없지 뭐. 들어오셔서 차 한잔 하고 가실래요?"


조용한 산사에서 차 한잔이라! 평소였으면 몽원다인이 마다 했을 리가 만무하지만, 등산화 밑창이 떨어져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천천히 하산하다 해가 떨어질까 걱정이 되어서 정중히 사양을 했다.


"어이구 스님. 정말 감사합니다만 제가 신발이 이 모양이라서 빨리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


그랬더니 스님은 세상 쿨하게,


"그래요 나중에 시절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 지겠지. 조심히 내려가세요"


라고 말씀하시면서 놓아주셨다. "차 한잔 하고 가실래요?" 생면부지의 등산객에게 차 한잔 권해주시던 그 말씀이 얼마나 감사하던지! 세상살이에 치이면서 벌어진 마음의 생채기가 얼마간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감사한 마음에 다음에 찾아 뵐 요량으로 스님의 법명을 여쭈었다.


"스님, 법명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게? 다 소용없어요. 우리 인연을 믿어 봅시다."


절뚝거리며 산을 내려오면서도 스님이 베풀어 주신 작은 친절에 마음은 계속 벅차올랐었다. 그리고 '내년에 햇차가 나오면 꼭 다시 찾아뵙고 햇차를 선물로 드려야지'라고 다짐했었다. 이후 계절이 바뀌어 단풍 지고, 눈 내린 산사의 소식이 늘 궁금했지만 다시 찾아뵙지는 못했었다.  



올해 햇차가 나오고 한참이 지나서야 산행에 나설 수 있었다. 하동에서 배달 온 우전 홍차를 고이 챙겨 들고 산사를 찾아갔다. 산사는 작년처럼 적막했다. 공양간으로 바로 가서 스님을 찾았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요사채로 가서 다른 스님께 말씀을 여쭈었다.


"안녕하세요. 작년 가을에 공양간에서 뵈었던 나이 드신 비구 스님을 찾아왔는데요. 어디 가면 뵐 수 있을까요?"

"아, 그 스님이요. 떠나셨어요. 다른 절로 옮기셨습니다."


그 순간, 선물로 드리려고 산 밑에서부터 소중히 들고 온 햇차를 잡아든 손에 힘이 풀렸다. '혹시 어디로 가셨는지' 물어보려다 관두었다. 우편으로라도 햇차를 보내드릴까 싶었는데 "시절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 지겠지"라고 하셨던 스님의 말씀이 떠 올라서 부질없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와도 아쉬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조계종 협회 이런데 연락을 해서 수소문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다시 절에 전화를 해서 옮기신 곳을 여쭤 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좋은 햇차 한 봉지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에. 그러나 이름마저도 버리며 소소한 세상 인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구도자의 눈빛이 떠올라 접기로 하였다. 나의 허튼 노력이 스님께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어디선가 친절로써 구도를 하시며 좋은 인연들과 차 한잔 드시고 계시겠거니.



그 스님께 전하지 못한 감사의 말씀을 지금 마시는 향긋한 홍차 향기에 실어 전한다. "차 한잔 하고 가시라"는 친절한 말씀 한 마디가 엄청난 위안이었고, 험한 세상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언젠가 시절 인연이 닿으면 다시 뵐 수 있기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차 한잔을 대접하리라. 꼭 그 스님이 아니어도 내 주변에 영혼이 지친 사람 누구에게라도 기꺼이 정성을 담은 차 한잔을 우려 드리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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