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담잡설(茶談雜說): 차 (또는 술) 마시다 떠오른 별별 생각
찬 바람이 불던 지난 겨울 어느 날부터 차 말고 다른 마시는 즐거움이 생겼다. 야근하고 늦은 퇴근길에 위스키 한 잔을 마시는 것! 근사한 바에 들러 마시는 게 아니라 걸어가면서 바람을 안주 삼아 위스키 도시락을 마신다.
사무실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벌써 손은 플라스크로 향하고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뚜껑을 돌려서 열기 바쁘다. 그리고 한 모금. 시원한 바람과 함께 위스키 몇 방울을 홀짝거리면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하다. 회사 앞에서 술을 마신다는 묘한 일탈감이 주는 희열도 있다. 방금 전 직장에서 끙끙 싸맸던 복잡한 고민들을 단칼에 끊어 주는 신기한 묘약이다. 요즘같이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더 말해 무엇하리. 차보다 휠씬 쎈 걸 찾을 수밖에 없는 시절이다.
빈 속에 독주를 마시면 30분 남짓의 짧은 퇴근길이라도 갈지자 보행을 수련할지 모르기 때문에 딱 30ml만 작은 플라스크에 챙겨 간다. 30ml는 약 1온즈로 작은 위스키 전용 글라스의 크기이다. 욕심 같아서야 서너 잔 담아 오고 싶지만 추태를 부릴까 걱정이고, 위스키도 차처럼 작가가 좋아하는 종류는 참으로 비싸서 자제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보통 찻잔이 60ml이니, 30ml는 정말 작은 양이다. 한 방울, 한 방울 음미하면서 아껴 마셔야 한다. 정확히 30ml를 재어서 고이 담아 출근한다. 이럴 때는 완벽한 차를 만들기 위해 갖춰놓은 계량 도구들이 참 유용하다.
술은 차만큼이나 참 신기한 액체다. 더위를 나는 데에도 추위를 이기는 데에도 유용하다. 미국 중서부로 처음 유학을 갔을 때, 에어컨도 없는 하숙집에서 여름을 난 경험이 있다. 우리나라의 무더위는 저리 가라 할 만큼 덥고 습했는데 그 여름을 맥주와 레모네이드의 도움으로 넘길 수 있었다. 동네 어귀에 있는 조그만 가게에 맥주 캔과 레모네이드 페트병을 사러 가는 게 중요한 일상이었다.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켜면 여름이 나지고, 위스키를 홀짝이면 겨울이 지나가니, 이거 신기하지 않은가? 위스키는 증류주라 불기운이 담겨서 그런가?
대만에서 차를 담아서 만든 리큐르와 칵테일을 여러 종 맛보았다. 철관음, 동방미인, 금훤, 문산포종 등등. 청차의 나라답게 화려한 청차를 활용한 칵테일 종류가 많았다. 알코올로 차의 향을 추출했다고 봐야겠는데, 차의 향을 잘 살린 것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 실망스러웠다. 차의 고유 향을 살리지 못하고, 베이스 술의 향과 섞이면서 이도 저도 아닌 향과 맛이 났다. 그중에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은 진(gin)에 문산포종을 우려낸 칵테일이었다. 문산포종의 청향과 진의 솔향이 합해지며 상큼함이 강조되어 좋았다. 바텐더에게 레서피를 물어봤더니 의외로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750ml 진 한 병에 문산포종 20g을 넣고 20분 동안 중불에 중탕을 하였다고. 한국에서 재현해 보리라 했었는데 아직까지 시도는 못해봤다. 언젠가는 꼭 내 차와 술 취향에 맞춘 퇴근약을 제조하여 복용하리.
걸어서 출퇴근하는 자의 특권이랄까? 밤공기를 안주 삼아 퇴근약을 마시는 나의 퇴근길은 오래도록 계속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