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끝나갈 때면, 지난 일 년 간 흩어져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깔깔거리는 순간엔 행복이 뭐 별거냐 싶다가도 불안 속에 뒤척인 밤도 많았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현실 앞에서는 자꾸 움츠러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언가를 읽거나 보거나 들었고, 동시대를 살아가고 재현하는 이 여자들에게서 삶을 배웠다. 길이 없으면 직접 길을 만들고, 일단 시작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끈덕지게 해 보는 것. 가진 게 없어도 삶의 원칙은 분명하고,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리고 함께하는 여성들의 힘을 믿는 것. 이 소중한 가치들을 알려준 사람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니까 내 연말결산은 한 해 동안 사랑했던, 그 존재만으로도 힘이 됐던 여자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의 ‘할멈(나문희)’
작년에서 올해로 넘어오는 동안 흠뻑 빠져들어 본 드라마다. 주저 없이 “올해의 드라마”로 꼽았던 지난 1월의 결정이 한 해가 끝나가는 지금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붕괴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던 이들이 끝내 상처를 마주하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내는 과정은 너무도 아렸지만 따스했다. 그 중에서도 극 중 ‘할멈’의 존재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사람들이 맨날 “할멈”이라고 불러서 이름을 몰랐던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찾아보니 등장인물 소개에도 ‘약장수 할머니’로만 나와 있었다.
이 이름 모를 할멈은 불행의 끝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주인공 강두가 유일하게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다. 강두가 힘들어 할 때마다 별 거 아닌 듯이 툭툭 던지는 말들엔, 사실 인생의 달고 쓴 맛을 모두 겪어본 자만이 할 수 있는 단단한 내공이 담겨 있다. 그래서 삶이 버겁다 싶다가도 할멈의 말처럼 “슬프고 괴로운 건 노상 우리 곁에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위로가 됐고, 사는 건 “더 멋지게 후회하고 실패하기 위해서”라는 말에 쫄지 않고 살아갈 힘을 냈다. 피를 나눈 가족 한 명 없어도 할멈의 병실이 사랑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것처럼, 내 인생의 마지막도 그런 모습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할멈을 완성시킨 건 오로지 배우 ‘나문희’였기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코미디언 송은이
올해를 빛낸 여성 예능인을 꼽으라면 연예대상 2관왕을 차지한 이영자도 있고, 많은 프로그램에서 열일한 박나래와 김숙도 있겠지만, 내가 가장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은 ‘송은이’였다. 몇 년 전, 데뷔한 지 20년이 넘었음에도 출연할 수 있는 방송이 점점 줄어들자 그는 직접 살 길을 모색하기로 한다. “평생 잘리지 않는 방송을 만들자”며 김숙과 함께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했고(‘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 엑셀을 배우더니 콘텐츠 제작 회사를 차렸다(‘콘텐츠랩 비보’). 그리고 마침내 올해, 데뷔 26년 만에 처음 초대된 백상예술대상에서 여자 예능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이 스토리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지만, 송은이에게 반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제작자이자 기획자로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분명한 방향성 때문이다. 내가 만든 판에서 ‘여성 동료’들을 더 많이 놀게 하겠다는 것. 그렇게 올해 <판벌려>와 <밥블레스유>가 세상에 나왔고, 이들은 ‘여성 예능’의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주류에서 밀려난 여성이 자신만의 길을 만들고, 더 많은 여성들과 함께 다시 기울어진 판에 올라서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멋진 서사가 어디 있나. 판을 만드는 것을 넘어 이제 흔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송은이가 또 어떤 재미난 궁리를 하고 있을지 기다려진다.
영국 뮤지션 ‘두아 리파(Dua Lipa)’
올해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5월에 열린 두아 리파의 첫 내한 콘서트에 다녀왔던거다. 티켓팅을 위해 친구들까지 동원했으나 무참히 실패하고 좌절하던 중에 기적처럼 취소표를 구할 수 있었다. 무려 두 장 연석으로. 주위에서 올해 운은 여기에 다 쓴 거라고들 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두아의 무대를 직접 봤으니 되었다. 혼자서 무대 전체를 압도하고도 남는 그 카리스마는 보는 사람들에게도 찌릿한 에너지를 준다.
두아 리파를 처음 알게 된 건 유튜브에서 우연히 ‘New Rules’ 영상을 보고서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적이라고 느꼈는데, 댓글에서 사람들이 이 곡은 가사와 뮤비를 꼭 자세히 봐야한댔다. 다양한 개성을 가진 여성들의 ‘시스터후드(자매애)’를 보여준 이 감각적인 뮤비에 빠져 본격적인 덕질을 시작하게 됐다. 특히 올해의 명장면은 빌보드 뮤직 어워즈에서 보여준 ‘New Rules’ 무대의 마지막 컷이다. 여성 댄서들과 함께 서서 오른손을 높이 치켜 올려든 장면은 아마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혹시 두아 리파의 노래가 더 궁금하다면, 가사가 사이다인 ‘IDGAF’와 이번 해 발표한 블랙핑크와의 콜라보 곡 ‘Kiss And Make Up’을 추천한다.
영화 <허스토리>의 ‘문정숙(김희애)’
몇 년 전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영화 <귀향>을 보고 한동안 너무 괴로웠던 기억이 있어서 <허스토리>를 보기 직전까지도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고통을 전시하지 않고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일종의 모범답안을 제시하는 작품이다. 일본 재판부 앞에 선 할머니들의 증언은 그 자체로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의 역사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할머니들과 함께 6년 동안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관부재판을 이끌었던 문사장 ‘문정숙’이 있었다. 처음에는 기업인의 사회공헌 정도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점점 할머니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면서 싸움에 앞장서는 인물이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았던 게 부끄러웠다던 이 평범한 여성은 다른 여성들과 연대하면서 투쟁의 주체가 되고,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간다. 김희애는 우아하고 단아한 이미지를 벗고, 인간적이면서 강단있고 진취적인 ‘문사장’을 입체적으로 연기해낸다. 이 재판으로 세상이 바뀌겠냐는 질문에 문정숙은 답한다. “세상은 안 바껴도 우리는 바끼겠지예.”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이렇게 멋진 여자가 부산 땅에 실제로 있었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 작가 이슬아
궁금했다. 매일 한 편의 글을 구독자에게 보낸다는 이 사람이. 또 매일 쓰는 글이란 어떤지도. 500쪽이 넘는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잠들기 전 침대맡에서 조금씩 쪼개 읽는 동안, 나는 이슬아와 이슬아를 둘러싼 세계를 엿보는 느낌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토록 솔직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가도 어쩌면 그래서 더 솔직해질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슬아의 일상과 관계는 모두 곧 글감이 되는데, 그 범위란 무척 넓어서 엄마 복희와 아빠 웅이, 동생 찬이, 이모는 물론이고 애인, 친구, 심지어 애인의 할아버지에게까지 가 닿는다. 그 모든 글이 사랑스럽고 따스할 수 있는 건 이들을 보는 이슬아의 시선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상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글들이다. 그 시선은 자기 자신에게도 유효하다. ‘과슬이(과거의 슬아)’와 ‘현슬이(현재의 슬아)’, ‘미슬이(미래의 슬아)’라는 같은 듯 다른 세 개의 자아가 이슬아를 설명한다. 수필집 서문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매일 용기를 내서 썼다.” 자신이 곧 글인 사람에게 매일 쓴다는 것은 곧 그만큼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일일 테다. 그건 실로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이슬아가 계속 용기를 내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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