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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키 May 03. 2019

위로가 필요한 시대의 예술

2019 백상의 여자들

지난 1일 제55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이 개최됐다. 모든 방송사의 TV 프로그램과 영화, 18년 만에 부활한 연극 부문까지 대중문화의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백상 시상식은 후보들의 참석 비율이 꽤 높은 편이다. 나눠먹기식 수상이 없고, 시청률이나 관객 스코어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도 다른 시상식들과의 차이다.


지난 1년 간 TV와 영화에서 활약한 많은 예술인들이 모인 자리, 올해는 TV 부문 대상, 극본상, 신인 감독상, 젊은 연극상을 포함해 총 13개 부문에서 여성이 트로피를 차지했다. 여자 예능인들은 수상자 호명 순간에도 재치 있는 포즈로 우리를 웃겼고, TV 부문 대상을 수상한 김혜자의 수상소감은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 2019 백상을 빛낸 여자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다섯 가지 장면을 골라봤다.


시상식 패션의 변화: 바지 정장에 운동화까지

코미디언 박나래 ⓒJTBC

이제 시상식에서 여자라고 꼭 드레스를 입고 구두를 신는 시대는 지났다. 이번 백상에서도 바지 정장 차림의 여성 연예인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그간 시상식에서 줄곧 바지를 입었던 김숙과 송은이를 비롯해 이영자는 정장에 스니커즈 운동화를 매치했다. 예능인만이 아니라 배우 권소현과 이정은, 시상자로 나선 김남주도 각자 개성 있는 색깔의 바지 정장을 골랐다. 특히 이 날 의상으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이는 단연 박나래였다. 올 봄 유행이라는 네온 컬러에 어깨를 드러낸  강렬한 의상은 박나래만이 소화할 수 있는 패션이었다. 


‘조금 낯선’ 배우들의 다짐 

왼쪽부터 배우 권소현, 이재인, 성수연 ⓒJTBC

“안녕하세요. 저는 조금 낯선 배우 권소현이라고 합니다.” 영화 <미쓰백>에서 악역 주미경을 연기한 권소현은 영화 부문 여자 조연상을 수상하고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즐겁게 왔지만 받고 싶었다며 울먹이던 그는 “앞으로 작품 안에서 맡은 역할을 충분히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배우가 되겠다”고 말했다. 영화 <사바하>로 여자 신인 연기상을 수상한 이재인은 “저를 만드는 건 저 뿐만이 아니라 저를 사랑해주시는 분들”이라며 “더 메워나가는 배우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18년 만에 부활한 연극 부문 ‘젊은 연극인상’의 주인공은 연극 <배우-액트리스 원: 국민로봇배우 1호>의 성수연에게 돌아갔다. 공연을 본 관객들을 위해 용기를 내 이 자리에 왔다던 성수연은 “여자 배우로서, 그리고 조금은 실험적이라고 여겨졌던 작품들을 해왔던 사람으로서 제가 이 상을 받았다는 것은 창작과정에서 조금 힘든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격려하는 의미라고 생각한다.”며 다부진 소감을 밝혔다. 


<SKY 캐슬>이 남긴 것

배우 염정아 ⓒJTBC

 20%가 넘는 높은 시청률로 종편 드라마의 새 역사를 쓴 <SKY 캐슬>은 백상에서도 여자 최우수 연기상, 여자 신인 연기상, 남자 조연상, 연출상까지 4관왕을 차지했다. 딸을 의대에 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엄마 한서진 역의 염정아와 이기적인 딸 예서 역의 김혜윤이 나란히 최우수 연기상과 신인 연기상을 수상했다. <SKY 캐슬>은 여성 주연을 앞세우고도 후반부 여성 캐릭터를 소비하는 방식에서 일부 아쉬움을 남겼지만(참고: 스카이 캐슬의 여자들), 어쨌든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수확이라면 ‘여자 배우들’이다. 염정아만 해도 드라마 이후 출연 제의가 부쩍 늘었다고 했다. 우리에게 더 많은 여성 주연 드라마가 필요한 이유다.


<미쓰백>의 세 여자들

이지원 감독과 배우 한지민, 권소현 ⓒJTBC

2019 백상의 주인공이라면 4관왕을 차지한 작품 <SKY 캐슬>이나 TV 부문 대상을 받은 <눈이 부시게>의 배우 김혜자를 들 수 있겠지만, 나는 시상식 내내 서로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부둥켜안고 함께 울고 웃던 이 세 명의 여자들을 꼽고 싶다. 이들은 바로 지난해 개봉한 영화 <미쓰백>의 이지원 감독과 배우 한지민, 권소현이다. 여성 주연에 아동 학대라는 사회적 이슈를 다룬 <미쓰백>은 수상소감에서도 여러 번 말했듯 제작하고 개봉하기까지 어려운 과정을 거쳤다. 그럼에도 여성 관객들의 지지로 결국 손익분기점을 넘겼고 여성 영화의 계보에도 의미 있는 지점을 남겼다(참고: 영혼으로 연대하기). 이지원 감독이 “이 영화의 미약한 불씨를 살려준” 관객들에게 특별히 감사 인사를 전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영화에서 강하고 거친 주인공 백상아 역을 맡은 한지민은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는 호평을 받으며 백상을 포함한 다수의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했다. 특히 한지민은 <미쓰백>을 전후로 영화 <허스토리>, <국가부도의 날>에도 특별출연하며 지난해 개봉한 여러 편의 여성 서사 영화에도 힘을 보탰다. 관객 수 72만 명의 결코 크지 않은 이 영화가 백상 영화 부문 3관왕을 기록했다는 것은 작품성과 배우들의 열연에 더해 <미쓰백>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높게 평가했다는 뜻일테다. <미쓰백>의 성공이 여성 감독, 여성 주연의 한국 영화를 더 많이 만들어 내길 기대한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의 예술

배우 김혜자 ⓒJTBC
제가 탈 지 안 탈 지 모르니까. 그래도 혹시 몰라서 뭐라고 인사말을 하나 그러다가, 여러분이 많이 좋아해주셨던 나레이션을 얘기해야지 그랬는데, 아무리 아무리 외워도 막 자꾸 까먹는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대본을 찢어갖고 왔어요.


TV 부문 대상을 수상한 김혜자는 이렇게 말하며 꼬깃꼬깃 접힌 대본을 펼쳤다. 연신 “어떡해”를 연발하며 쑥쓰러워하던 모습도 잠시, 드라마 <눈이 부시게> 속 김혜자가 되어 이야기를 시작했다(참고: 눈이 부시게, 애틋한 인생). 별 거 아닌 하루라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고, 후회와 불안 때문에 지금을 망치기보다는 눈이 부시게 오늘을 살아가라던 마지막 회의 나레이션은 김혜자의 말처럼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됐다. 그리고 그 배우는 생방송에서 수상소감 대신 연기로 또 한 번의 뭉클함을 선사했다.


곧 80을 앞둔 노년의 여배우가 나이와 경력이 주는 공로상이 아니라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은 감동적이다. 아마 현장에 있던 여자 배우들이 흘린 눈물의 의미도 이와 비슷했으리라. 대상 수상자 김혜자는 자신으로 예술의 존재 의의를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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