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책 <일하는 여자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처음으로 ‘일’이라는 걸 시작하게 됐다. 족히 십 년은 넘게 내 소속이자 정체성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학생”이 “직장인”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동안 해 왔던 알바들과는 또 다른 새로운 느낌이었다. 첫 직장의 월급이 시급으로 치면 최저임금에 겨우 맞춘 수준이라 수입 측면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스무 살 성인이 됐을 때와는 다른 묘한 책임감과 안도감도 생겼다. 내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겠구나-하는. 어쩐지 사회에 쓸모 있는 인간이 된 기분도 들었다. 아무튼 열정과 희망이 가득했었단 얘기다.
어린 나이에 낮은 직급, 게다가 여성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만났을 때, 그 자체만으로 너무나 쉽게 무시당할 이유가 된다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일하는 여성’으로서 나의 존재를 고민하게 된 것은. 실무하는 자리엔 여성들도 많은데 왜 권력과 마이크는 모두 남성에게 가는지, 왜 여성들은 어느 순간 하나 둘씩 사라져 가는지. 분명 좋은 동료들이 있었지만, 10년 뒤 내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롤모델’은 없었다.
그러면서 문득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다들 이 길의 어디쯤을, 어떻게 지나고 있는지. 어떤 고민을 했고, 또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대단한 혜안이 아니더라도 그저 존재하는 목소리들이 듣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발견한 이 책 <일하는 여자들>은 제목만으로 펼쳐 들 이유가 충분했다.
인터뷰어이자 책의 저자인 ‘4인용 테이블’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던진 질문도 비슷했다. 이들 역시 일하는 여성 네 명으로 구성된 크리에이티브그룹이다.
젊은 남성이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선배 남성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는 서사는 차고 넘치도록 많다. 성공한 여성의 사례를 보거나 듣는게 같은 여성에게는 정말 중요하다. 이런 책 어디 없을까?
펀딩으로 디지털콘텐츠를 예약 판매하는 미디어 ‘퍼블리’에서 이 콘텐츠는 목표액 100만원을 훌쩍 넘겨 333만원을 달성했고, 올해 초에는 새로운 인터뷰이까지 더해 책으로도 출간됐다. 이런 이야기에 갈증을 느끼던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책에는 기자, 감독, 공연 연출가, 에디터, 아티스트 등 일하는 여성 11명과의 인터뷰가 담겨있다. 모두 ‘자신의 영역에서 나름 흔적을 남기며 일해왔고, 지금도 일하고 있는 여자들’로, 대부분 저자들과 일로 인연을 맺은 문화/예술/미디어계 종사자들이다. 각자가 서로 다른 일 경험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읽다 보면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은 어느 지점에선가 교차된다.
일하는 여성으로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일의 분야나 경력, 개개인의 성격과는 관계없이 내가 ‘여성’임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들. 그건 구조적 제약으로 존재하기도 하고, 나를 향한 시선이나 인식, 상대와의 권력 관계 속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어찌됐건 내가 가진 능력과는 무관하게 ‘여성’이기 때문에 마주해야 하는 현실과 고민들이 있기 마련이다.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도 비슷한 순간들을 겪었다. 외모나 옷 때문에 욕을 먹기도 하고, 자신의 성취를 두고도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주위 동료들이 성추행 당하는 걸 보거나 듣고, 때로는 자신이 그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동등한 사업 파트너로 인정받지 못했고, ‘기혼자’라는 이유로 자신의 직업 대신 누군가의 와이프로 불려야 했다. 자신이 여자라서 더 ‘감정적’인 건 아닌지 스스로에 대한 자기검열도 하게 됐다.
그럼에도 이들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모습은 왠지 든든하고 뭉클하기까지 한다. 그것이 자신과 주위 동료들, 나아가서는 ‘다음에 올 여성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는 대중문화 영역에서의 여성혐오를 지적하고, ‘방송인’은 여성 이슈에 대해 계속 말하고, ‘극작가’는 여성 중심의 서사를, ‘영화감독’은 멋진 여성이 나오는 작품을 만드는 날을 꿈꾼다.
‘여성’으로 일하기가 요즘 내 최대 관심 화두이다 보니 글이 이렇게 흘러왔지만(!) 사실 이 책에는 11명 인터뷰이들의 일 경험과 관련해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특히 일을 대하는 이들의 신념과 가치, 태도는 잘 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일을 떠나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아는게 중요하다는 것과 좋아하는 일이 꼭 생계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 그럼에도 꾸준히 밀고 가는 동력은 어디서 나오는지도.
무엇보다 이들은 세상이 정해놓은 틀에 애써 나를 끼워 맞추기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길을 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거창한 성공을 이룬 사람들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비록 힘겹고 고되더라도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고, 그 ‘과정’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여서 더 좋았다. 아마 인터뷰이들이 대부분 조직을 떠나 프리랜서로 일하거나 스스로 회사를 꾸려가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물론 이 길만이 결코 ‘정답’일 수 없고,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꼭 들어맞는 조언은 아닐 수도 있다. 삶의 모습은 제각각이고 우리가 놓여있는 상황도 다 다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이렇게 멋지게 제 몫을 해내고 있는 여성들이 존재하고, 그걸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시금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일하는 여성으로 계속 ‘존재’하리라. 사라지지 않고, 지키고 맞서면서.
[일하는 여자들 / 책]
발행일: 2018.01.12
저자: 4인용 테이블(윤이나, 정명희, 황효진, 장경진)
출판사: 북바이퍼블리(book by PUB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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