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피형이다. 극강의 회피형이라 매일 회피형 테스트 하면 상위권에 있다. 전혀 자랑스럽지 않게 여기고 있고... 아마 회피형을 방어막으로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회피형이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내가 어렸을 때 자라온 양육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았을 거고, 첫 번째 연애 상대가 너무 구리기도 했다. 그 사람은 나에게 고도의 가스라이팅을 했고 내가 보고 싶어서 만나자고 해도 자기는 혼자 노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다 부정했다. 나는 많이 울었다. 그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무튼 그런 사람에게 크게 데이고 나니 누구를 만나도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지금 손 잡고 있는 이 사람이 언제 돌연 변할지 모르는 거니까. 갑자기 얼굴을 싹 바꿀 수 있으니까. 내 생각에 회피형의 맹점은 상대가 변하는 걸 두려워 자기 마음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많은 블로그와 전문가들이 회피형의 특징으로 짚고 있긴 하지만..) 문제는 이게 회피형 자기 자신에게도 너무 지옥 같다는 것이다.
밀당 같은 거 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싶은데도 그 말이 턱끝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 느낌을 계속 받는다. 그 기분은 하나도 즐겁지 않다. 울음을 참는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도 든다.
회피형은 계속 그 관계를 견디고 있다. 관계란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 과정을 여행하듯이 매순간 즐기고 계획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이상적이겠다. 근데 계속 견디는 느낌이 든다. 항해로 비유하자면 상대는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여기고, 그 다음엔 여기를 갈 거야, 해도 남의 일인 것처럼 듣고 있다. 상대도 외롭겠지.
언젠가 유튜브인가에서 그런 말하는 걸 봤다. 전 연인과 지금 만나는 사람은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 말은 매우 일리가 있다. 그 사람과 이 사람은 다르고 이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니까 같은 상처를 줄 거라는 보장이 없다. 그렇지만 머리를 점령하는 생각이 있다. 계속 제어를 거는 느낌. 전혀 그 관계에 몰입할 수가 없는 느낌.
세상의 회피형들은 연애는 고사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사는가 궁금하다. 회피형에게는 사랑이 더 어려울까, 연애가 더 어려울까? 회피형과는 절대 연애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사람의 인연이라는 건 '위험구역'이라고 써붙여도 계속 이어지는 것이고, 사람의 인연이 계속 이어진다는 건 요즘 같이 인연이 쉽게 끊기기도 이어지기도 쉬운 세상에서 매우 귀한 것이다. 그걸 아는 사람이라면 나는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는다.
우선 나는 나의 우선순위를 다시 점검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람과 더 친해지고 싶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어떤 관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은 필연적으로 좋은 감정만 따라오진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
나를 비롯한 회피형들이 자기가 가진 성향을 너무 미워하지만 않고 더 나아지기를 믿었으면 좋겠다.
사랑은 그런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