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컨을 내려 놓고 펜을 들다
덜커덩,
두꺼운 철문이 작은 키 하나로 열린다. 구옥 빌라의 현관문은 번호키가 아니라 딸랑거리는 열쇠로 잠금을 하고 있다. 불편하지만 확실하게 안심이 되는 문단속 방식이라 생각하며 현관으로 들어선다.
"다녀왔습니다~"
컴컴한 거실의 전등 스위치를 올리며 대상 없이 인사말을 내뱉는다. 집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지만 이제 안전지대에 들어섰다는 안심, 혹은 편안함에 나지막이 읊조리는 나만의 작은 의식이다.
뒤이어 작은 한숨을 내쉰다. 이제 긴장 속에서 보낸 일과는 일단락되었고, 마침내 집에서 제대로 된 휴식을 할 수 있다. 집으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현관문 열쇠를 지정 자리에 올려두고, 가방을 식탁 의자에 턱 하니 올려놓는다. 다음은 화장실로 가 비누로 손을 씻고,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평일엔 외식을 하지 않는 나는 귀가하면 저녁부터 차린다. 점심은 항상 식당밥이라 저녁은 간단히라도 내 손으로 차려 먹은 지 오래되었다. 쌀밥을 좋아해 한 그릇 꾹꾹 눌어 주말 동안 냉장고에 만들어둔 반찬을 꺼내 먹으면 그게 제일 속이 편하다.
배를 채우고 나면 이제 남은 건 휴식. 세상 편한 자세로 비스듬히 누워 리모컨을 집어 든다. TV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손가락만 까딱이며 보내는, 무작정 게으르고 하릴없이 보내는 이 순간을 하루 종일 기다렸다. 청소나 빨래는 웬만하면 주말에 몰아서 한다. 평일 저녁 집에 돌아와서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다음 날의 체력을 비축해야 하니까.
한동안 나에게 휴식이란, TV 속 화면이었다.
'도파민의 시대'라 불릴 만큼 즉각적인 재미를 주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어플만 들어가도 심심한 틈이 없고, OTT 채널이나 TV 프로그램은 언제 봐도 새로운 프로그램이 뜬다. 하나를 보려고 클릭했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영상에 정신을 뺏기다 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가버린다.
한때는 퇴근 후 짧은 영상 보는 재미에 빠져서 생각 없이 눈동자만 굴리면서 화면에 빠져들었다. 가보지 못한 여행지 정보도 있고, 재밌는 영화도 요약해 주고, 온갖 경치도 구경하면서... 그러다 계속 알고리즘을 타고 영상을 계속 보는데 어느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창을 닫았다. 마치 인스턴트 음식을 과식한 것처럼, 마지막엔 씁쓸한 기분만 남게 되는 인스턴트 재미일 뿐이란 건 느끼며.
더 이상 일시적인 도파민은 재미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진짜 재미를 경험하고 싶은 욕심 말이다.
영상으로 보는 것 말고 내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재미를 찾고 싶다는 열망이 스멀스멀 올라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뭘 하면 좋을지 찾게 되었다. 그냥 가만히 누워서 쉬는 것 말고,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하면 좋을지 생각하다가 나는 낙서처럼 글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왜일까. 녹초가 되어 귀가해도 하고 싶은 일은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학교에서 처음 들은 칭찬은 글쓰기였다.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사회에서 나의 존재감을 인정받는 첫 순간이지 않았을까. 화정이는 작가 하면 되겠다며 말해주던 담임 선생님과, 그날의 장면이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덧붙여서, 작가는 돈 많이 버는 직업은 아니라는 말씀도. 열 살이 채 안된 아이였던 화정이는 그 후 종종 글짓기 대회에 나가고 상장도 받았지만 학생부의 희망직업란에 작가를 쓴 적은 없었다.
희망직업은 아니었지만 이후에도 화정이는 취미처럼 글을 썼다. 일기의 형태로, 낙서의 형태로, 이런저런 상념을 글로 쓰기를 좋아했다. 그 이유를 찾아보자면, 글을 써야 명확해지곤 했던 것 같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 주는 방법이었다. 또한 쓰는 동안에는 휘몰아치는 감정을 차분하게 다스릴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
그러니까 글쓰기란, 한 발 떨어져서 나를 보는 장치인 셈이다.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어도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처럼, 좀 더 내 인생을 즐겁게 바라보고 싶어서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힘든 일도 글로 쓰다 보면 조금 괜찮아 보이기도 하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언제나 노트를 들고 다니고 있다.
한때는 스무 살이 되면, 서른이 되면 다 컸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한참 나이를 먹은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고, 아마 환갑이 되어서도 그때의 새로움이 있을 테지. 그래서 나는 예전에도, 지금도, 무언가를 쓰고 싶나 보다. 인생은 예측 불가능하고, 쉽지 않고, 끊임없이 배워나가야 하는 것이기에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일상에서 직접 부딪히며 배우는 것들을 열심히 글로 기록하자. 힘들고 괴로운 순간들이 나중엔 전화위복이 될 수 있도록.
화정이 쓰는 노트의 제목은 <어바웃 라이프>로 정했다.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며 지질하고 구질한 현재의 기록이 될 것 같다. 일상 속 에피소드를 쓰다 보면 스스로 허허~하면서 웃어넘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한 페이지씩 써볼까 한다. 직장 생활을 하며 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싶은 사람의 일상이자, 비극과 희극, 그 사이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