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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stain Life Aug 22. 2023

겐트에서 아침을

스마클릭




벨기에는 유럽 대륙에서 가장 먼저 철도가 부설된 나라다. 그 역사는 18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1870년대부터 1958년까지 모든 간선이 국유화되었다. SNCB, NMBS로 약칭되는 벨기에 국철은 지주회사 방식의 경영권을 갖고 있으며 국내선과 국제선을 운용한다. 국제선은 인접국(프랑스 TGV, 독일 ICE ) 소유의 고속열차와 공동출자로 이루어진 탈리스, 유로스타가 있다.


벨기에 국영 철도 열차는 다섯 등급으로 나뉜다. INT, IC, IR, L, P. 등급별로 정차역과 운행 속도가 상이하다. 여행객이라면 IC 등급의 열차가 주 이동 수단이 될 것이다. IC는 코레일 무궁화호에 견줄만하다. 그러나 열차 이용 방식이 다소 낯설다. 표를 끊을 때 시간과 좌석을 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탑승 날짜와 출발-종착역이 표기된 티켓을 발권하고 2-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열차를 하루 안에 자유롭게 이용하면 된다.



자, 이제 정차역을 놓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러니까 파리 북역에서 탈리스에 몸을 싣고 브뤼셀 중앙역에 도착한 우리는 인접한 브뤼셀 남부역으로 걸어가 벨기에 국영철도인 IC 라인으로 환승해 'Sint Pieters' 역에 내리면 되는 것이었다. 브뤼셀 남부역에서 겐트까지 약 20분이 소요되며, 그 사이엔 기차가 서지 않는다. 파리 북역에서 출발하는 탈리스가 30분 가까이 지연된 것이 화근이었고, 미뤄진 시간만큼 촉박해진 환승 시간은 숨턱을 조여왔다. 초행길에 벨기에 국영철도가 정액제라는 사실을 알 턱이나 있나.



그렇게 간신히 겐트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지만 정차역을 지나치고 만 것이다. 기차는 북녘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이름조차 생소한 간이역 서너 곳을 스쳐간 기차는 약 10분 뒤 멈춰 섰다. 우리는  <Aalter>라 적힌 팻말이 덩그러니 놓인 플랫폼에 우뚝 서서 아무 말 없이 상행선 기차를 기다렸다. 얼마 뒤 기차가 도착했고, 남편과 나는 텅 빈 객실에 올라 털썩 주저앉았다. 기차가 출발하고 승무원이 다가왔다. 검표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서울에서부터 들고 온 A4 용지를 건넸다. 탈리스와 SNCB 환승 티켓이 한 면에 인쇄된 종이였다. 승무원은 환승표가 유효하지 않은 것이라 했다. 맞는 말이었다. 역방향으로 가고 있었으니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처연한 얼굴로 승무원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아니, 두 손 모아 간절히 빌었다고 할까. 단호하게 잘못을 다그치던 승무원은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를 고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돌아올 때는 승무원이 검표를 하지 않아 갑자기 변경된 환승역을 놓쳐 버린다. 길을 잃은 건 매 한 가지).


이것이 겐트를 찾은 플랑드르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듯하지만 느슨한 배려와 방관이 충돌하는 자유로우면서도 다소 엄숙한 분위기.





우여곡절 끝에 다시 겐트로 돌아온 우리는 마중 나온 애진의 차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현대식으로 개조한 벨기에 전통 가옥 2층 방에 짐을 풀고는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밤을 보내고 퉁퉁 부은 얼굴로 아침을 맞이하자 뒤뜰에 유월의 호사가 펼쳐져 있었다. 유럽에 발을 들인 것이 비로소 와닿는 순간이었다. 청나라 도자기가 물밀듯이 밀려오던 시절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빈티지 그릇, 버터와 치즈 요거트 등의 수도 없는 변주의 신선한 유제품, 한식 밥상의 간장 종지처럼 자연스레 놓인 에그 홀더, 뜰에서 갓 따낸 딸기, 제철에 넘쳐나는 살구와 루바브를 설탕에 조린 잼까지. 애진의 명랑한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Smakelijk (잘 먹겠습니다)!







나는 아침식사를 하면서도 내심 어제의 일이 떠올렸다. 만약 중간에 내리지 않고 종착역까지 갔으면 어땠을까? 도버 해협을 맞댄 블랑켄베르허 Blankenberge 당도했을 것이다.  새하얀 모래가 반짝이는 해안가에서 하룻밤을 청하고 홍합 요리를 실컷 먹은  돌아오는 길에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브뤼허 Brugge 들렀을 것이다. 경험반면교사 삼을 여유는 언제쯤 부릴  있을까? 그나저나 겐트의 중앙역은  'Sint Pieters' 불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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