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클릭
6월의 첫날이었고 그 해 처음 폭염주의보가 발효된 초여름이었다. 벨기에 직항 항공편이 없는 까닭에 샤를 드골 공항에서 파리 북역을 거쳐 브뤼셀 중앙역으로 가는 여정을 조합한 터였다. 좀처럼 해가 사그라들지 않는 유럽의 여름, 기차는 프랑스 동녘에 펼쳐진 푸른 들판을 달린다. 프랑스와 벨기에를 가르는 경계에 근접했을 때 귓불을 때리는 알람이 간헐적으로 울렸고 국경을 넘자 우리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파리 북역에서 포장해 온 샌드위치를 꺼내 먹었다.
두 시간 남짓 달린 기차는 브뤼셀 중앙역에 당도했다. 프랑스 말이 간간이 들리지만, 파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긴장감이 엄습한다. 백색 소음도, 공기의 냄새와 질감도 낯설기만 하다. 잔뜩 경직된 몸으로 인접한 브뤼셀 남부역으로 걸어가 역무원에게 겐트행 열차 플랫폼을 재차 확인한다. 네덜란드어 억양의 영어를 구사하는 붉은 곱슬머리 남자는 퍽 살갑게 손짓해가며 플랫폼을 알려준다. 엘리베이터는 고장났고 에스컬레이터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유럽의 아날로그스러운 제반 시설에 제법 익숙해진 듯도 싶다. 카메라와 렌즈, 무거운 장비로 가득한 30kg에 육박하는 캐리어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려 플랫폼에 오르자 기차를 장식한 땡땡 Tintin 그라피티가 벨기에에 당도했음을 실감케 한다.
겐트로 향하는 벨기에 국영 열차 차창 밖으로 집과 집이 벽을 맞댄 전통 가옥과 아름드리와 들풀과 뭉게구름이 스쳐간다. 플랑드르 유화가 흐르고 또 흐른다. 이대로 겐트에 안착해 애진이 내어준 따듯한 저녁 식사를 들이켜면 비로소 하루가 저물 것이다. 유럽의 중세를 고스란히 품은 작은 도시를 산책하며 플랑드르의 아우라를 만끽할 것이다.
오후 여덟 시가 다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한낮 같은 아름답고 낯선 풍경에 그만 정신을 놓아버린 것일까?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시공간에서 우리는 겐트를 지나쳐 버리고 만다. 예정대로라면 오후 7시 40분 <SINT PIETERS> 역에 내려야 했지만, "SINT PIETERS"역명이 "GENT"가 아니라는 연유로 정차역을 오판해 버린 것이다. 약 5분간 머무른 <SINT PIETERS> 역에서 남편과 나는 캐리어를 내렸다 올리는 실랑이를 반복했다. 남편은 도착 시간이 일치한다는 이유로 이곳이 겐트가 맞을 것이라 했고, 나는 안내 방송에 "겐트"라는 단어가 나올 때까지 기차를 타고 있어야 한다고 우겼다. 역무원의 다급한 호루라기 소리에 놀라 캐리어를 기차 위로 집어던지자 열차문이 굳게 닫혔다. 기차는 유유히 출발했다. 역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애진과 메시지를 주고받은 뒤에야 나는 실수를 인정하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 한숨을 내쉬며 그저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기차가 멈췄다. 우리는 울상이 되어 기차에서 내렸고 아무도 없는 플랫폼 우뚝 선 채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희미한 바람에 나부낀 온갖 들풀사이로 가축 퇴비 냄새가 밀려온다. 도버해협을 머금은 해풍이 발가벗은 살갗에 나부낀다. 영원히 드리울 것만 같은 석양은 프레이야의 눈물처럼 황금빛으로 번진다. 돌아갈 길이 아득하지만 도무지 밤이 내릴 것 같지 않은 지평선을 언제고 다시 마주할 것인가? 플랫폼엔 남편과 나, 캐리어 두 짝만이 덩그러니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