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클릭
일상은 관성의 리듬에 맞춰 흘러가고 있었다. 휑했던 옥상 정원은 절정을 향해 피어오르는 중이었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아기 고양이들은 용마루 너머 그 작고 귀여운 귀를 뾰족 세우고 이따금 눈인사를 건넨다.
그러는 사이 벨기에 국왕과 왕비가 한국을 방문했다. 한-벨기에 정상회담 등 주요 행사를 마친 국왕은 방한 사흘 째 되던 날 성수동 S-Factory에서 열리는 <벨지안 라이프 페스티벌> 개막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돼지고기, 초콜릿, 맥주, 다이아몬드 등 벨기에 주요 수출품을 소개하는 교류의 현장이 될 것이라 했다.
애진은 벨기에 돼지고기 가공업체인 VLAM 과 손을 잡고 베이컨 요리를, 연인 시오엔은 피아노 퍼포먼스를 선보일 예정이었다. 애진은 포토그래퍼 남편에게 현장 스케치를 부탁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한된 동선 안에서 국왕 내외의 모습을 담기 위에 프레스와 대치 상황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소 난감했지만 책 작업 이전에 친목을 도모하는 일이라 여겼다. 그보다 21세기에 여전히 존재하는 왕정에 환상을 품은 것도 사실이었다. 국왕을 가까이 영접할 수 있다는 환상. 마치 유니콘의 뿔을 더듬을 수 있을 것 같았다고나 할까.
<벨지안 라이프스타일> 이 열리던 날 성수동에서 작은 벨기에를 만났다. 애진은 보다 느긋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경비가 퍽 삼엄했지만 낯선 알파벳 조합 틈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KIM Zinho_VLAM fotograaf
JANG Bohyun_VLAM assistente fotograaf.
행사장에서는 돼지머리가 무엇보다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삶은 돼지 머리는 고사상에 오르곤 한다. 고사는 액운을 없애고 행운과 풍요를 기원하는 우리의 전통 의식이다. 애진은 한국 고유 식문화를 벨기에 축산업과 접목하는 위트를 보여준 것이다.
애진과 처음 만난 날, 그녀는 자신이 입양아라고 스스럼없이 얘기했다. 겐트에 살고 있던 음악 평론가 아버지와 공무원 어머니, 그리고 손 위 형제가 있는 가정에 입양되어 벨기에인이 되었고 법적 성인이 되는 18세부터는 스스로 삶을 꾸려왔다고 했다. 성인이 된 후, 한국을 오가며 뿌리를 찾기 위한 여정을 이어갔고 한국 음식을 통해 치유하고 공감하며 정체성을 회복해 간 것이다. 그녀에게 한국 음식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묘약이었던 셈이다. 애진이 여전히 낯설지만 돼지머리에 이끌린 그녀의 비합리적인 대담함이 왠지 익숙하다.
벨기에 측 취재진의 열기는 대단했다. 그들은 국왕과 왕비와의 만남을 일생의 영광으로 여겼다. 나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권태를 국왕의 얼굴에서 보았다. 왕과 왕비가 고귀한 악수를 사람들에게 건네고 바람같이 사라지자 벨기에 인들은 설렘과 긴장감, 실망과 허탈함으로 뒤범벅된 얼굴을 하고서 초콜릿을 먹고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낯설기만 했던 플랑드르인들로부터 연민이 느껴졌다. 미지의 세계에 드리운 안개가 한 꺼풀 걷히는 듯했다. 취재진들이 썰물처럼 밀려 나가자 나 또한 긴장이 풀렸는지 다시금 위염이 도질 것만 같았다. 이 고질적인 신경성 위염은 겐트로 날아가야 실마리가 풀리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