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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현 Aug 26. 2023

줄리의 초콜릿 케이크

스마클릭






여기서 잠깐, 생일의 기억을  번씩 더듬어보도록 하자. 태초의 기억은 당연히 없다. 자신이 태어난 날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나는  말을 곧이 믿지는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생일의  기억은 7살이 되던 , 대영 유치원 햇님반의 여름에 태어난 아이들의 합동 생일잔치. 수박  통이 지그재그 모양으로 반토막  있고 파스텔톤 슈가 플라워가 올라간 버터케이크가 놓여 있다. 슈퍼마켓을 통째로 옮겨 놓은 듯한 별별 과자와 사탕이 접시 위로 쏟아졌고 양념 통닭과 김밥이 침샘을 자극했다. 마분지 왕관을 머리에 쓰고 젤리로 엮은 사탕을 목에 걸고서 일곱개의 빛나는 촛불을 향해 온힘을 다해 날숨을 뱉었다. 생일을 맞이한 그날만큼은 세상을  가진 것처럼 온종일 설렜다. 그러나 18 맞이한 생일은 조금은 우울하고 다소 뭉클했다. 여름 방학을 일주일 앞둔 토요일, 나는  그렇듯 지각을 했다. 단축 수업이 끝나고 다들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굣길에 올랐지만 지각생들은 교실에 남아 반성문을 써야 했다. 나는 불현듯 설움에 북받쳐 눈물을 쏟으며 신세한탄을 하고 말았다. 대충 이런 독백이었다. '으앙, 오늘  생일인데 이렇게 붙잡혀 있는  너무하잖아'. 늦은 오후가  되어 교실을 빠져나올  있었던 지각생들은 일련의 동지애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가 나타났다. 17개의 초가 불꽃을 그리며 훨훨 타고 있었다. 그저 아침잠이 많았을 뿐인 동지들이 용돈을 보태 학교  빵집에서 생일 케이크를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생일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고 때로는 고요하게 때로는 떠들썩하게 흘러갔다.


왜 갑자기 생일 이야기를 꺼냈냐면, 그날은 남편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겐트에 온 지 겨우 사흘이 되었을 뿐인데 미역국을 끓이고 조기를 구워 생일상을 차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애진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남편을 다독이며 씁쓸하게 첫 촬영에 임했다.



애진은 본격적으로 장을 보기 , 냉장고를 차지하고 있던 식재료를 내 들었다. 오이 무침과 배추 겉절이, 감자채 볶음과 불고기가 첫 촬영의 피사체였. 여전히 모든  낯설기만 한데 식탁 위의 풍경은 친근하다. 겐트까지 오는 여정이 쉽지만은 않았는데 긴장을 늦춰도   같은 기시감이 엄습한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플랑드르 지천의 감자밭은 새하얀 별꽃을 터뜨리고 호시절을 맞아 푸르게 영근 오이며 배추가 풍요를 속삭인다. 애진의 손끝이 분주하다. 중국 마트와 한국에서 공수고춧가루와 참기름, 간장과 액젓이 유럽의 제철 식재료 사이에서 춤을 춘다. 그렇게  촬영을 무사히 마친 우리는 프로젝트에 대한 무게감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있었다.



촬영  남은 음식은 우리에겐 생명수와도 같았다. 겐트에서 이토록  차려진 한식을 매일같이 먹을  있다니! 애진이  수년간 한국을 오가며 체득한 고국의 맛은 궤도에 오른 듯했다. 정갈하게 맛있는 한식의 표본과 같았다 할까. 나는 남편에게 미역국  그릇만 보태면 생일상과 다를  없다며 농담을 건넸다. 애진은 눈치껏  말을 알아듣는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오늘이 남편이 생일이라 일러주었다. 애진은 미리 얘기하지 않았느냐며 진심으로 아쉬움을 표했다.



식사를 마치고, 애진은 우리에게 공장에 입주한 이웃들을 소개해 주었다. 월요일을 맞은 코워킹 스페이스는 교회당으로 변모한 어제와 다르게 활기를 띠고 있었다. 1906년의 세상과는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2019년의 사람들은 에스키모 섬유회사의 전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포도나무 덩굴에 이끌려 발길이 머문 에스키모 공장 부지 안의 한 레스토랑.



높은 층고와 오래된 붉은 벽돌 조적의 천장, 훤히 트인 공간감과 적재적소에 놓인 사물들, 곳곳에 배치된 큼지막한 식물 등이 눈길을 끈다.



애진의 작업실과 벽을 맞댄 이웃은 줄리의 초콜릿 케이크 공장이다. 애진에 의하면 겐트에서, 아니 벨기에에서 가장 맛있는 초콜릿 케이크라고. 역 앞 트럭에서 소소하게 팔던 것이 입소문을 타고 겐트 전역에 소문이 나버렸다고. 맛은 역시나 솔직하고 평등하다.



줄리의 초콜릿 케이크 공장을 나와 계단을 타고 2층에 오르면 코워킹 스페이스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공유 오피스가 자리하고 있다. 자율성을 기반으로 창의력을 끌어내고자 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머리를 맞댄 채 노트북을 펼치고 있다.



편향된 가치를 지양하고, 정치적 정당성(Political Correctness) 지향하는 시대의 흐름은 겐트에서  당연한 이야기다. 오히려 훨씬 진보적이며 미래를 향해 열려있다. 어렴풋이 전해오던 자유공기 명백한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겐트 시의 정책적 모토가 바로 '지속가능성'이었던 것이다. 오래된 가치를 지키며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겐트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나는 지속가능한 삶의 단면을 엿보았다. 겐트에 머무를수록  밀도는 더욱 높아졌는데, 이야기는 차차 풀어 나갈 것이다.



짧은 투어를 마치고 작업실로 돌아온 우리는 창가에 앉아 애진을 기다렸다. 주방정리를 마무리하고 곧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줄리의 초콜릿 케이크를 두 손에 든 애진이 우리에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남편은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애진을 향해 그윽한 눈을 끔뻑였다. 포크를 들기 전, 애진을 향한 인사말도 빼놓지 않았다.


스마클릭, Smakelijk (잘 먹겠습니다)!




줄리의 초콜릿 케이크는 너무도 달콤했고 입속이 달라붙을만큼 진득했다. 말로만 듣던 벨지안 초콜릿의 풍미가 혓바닥을 새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우리는 낯선 공감각을 잠시 내려놓고  이어오던 일상의 꼬리를 움켜쥐었다. 겐트에서 맞이한 생일이 뜨거운  속에 담긴 마른 허브 잎사귀처럼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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