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클릭
'커먼즈 (Commons)'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말 그대로 공통의 것, 누구에게나 주어진 무엇을 뜻한다. 공기, 물, 흙과 같이 순환하는 자연이 커먼즈에 속할 것이다.
커먼즈는 공적이거나 사적인 영역과는 다른 개념이다. 숲, 해변, 강물, 바다와 같은 커먼즈는 항상 존재해 왔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규율을 정하고 자원을 나눴다. 그러나 근대로 올 수록 자본주의가 팽창했고 시장은 사유화되었다. 공권력은 국가의 주도 아래 더욱 견고해졌다. 이전까지 당연히 누렸던 '공통의 영역'은 점점 주변화 되어갔다. 이에 소외감을 느낀 사람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커먼즈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디지털 혁신으로 정보의 세계화가 물결치던 2005년, 네덜란드의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가 <P2P 재단>을 설립할 무렵이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스스로 정보를 공유하며 지식의 보편화를 이루어갔다. 디지털 커먼즈로 촉발된 커먼즈 운동은 도시 커먼즈로 확장되었다.
도시 커먼즈(Urban Commons)는 일종의 사회 실험 모델이다. 도시는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시민은 연대를 형성해 자발적으로 도시를 가꾼다. 겐트, 볼로냐, 암스테르담, 바르셀로나, 벨로오리존테, 나폴리, 몬트리올, 릴, 마드리드 같은 도시들은 지역색을 살리려는 노력뿐 아니라 정책 투명도 높이기, 사회적 협동조합의 창출과 활성화, 공터의 공공화 등을 정책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도시 커먼즈 모델로 가장 먼저 손에 꼽는 도시가 바로 '겐트'다. 중세부터 상업 도시로 발돋움한 전통(길드 체제의 연대 경제)을 바탕으로 겐트시는 여느 도시보다 성공적인 선진적 정책을 전개하고 있다. 겐트에 존재하는 약 500개가 넘는 도시 커먼즈 프로젝트가 바로 그 예다. 겐트 시민들은 커뮤니티, 환경, 에너지, 주거, 식량,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커먼즈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도시 내에서 지속가능하며 윤리적인 경제 체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재생 에너지 협동조합을 설립해 주택 지붕의 태양열 패널을 관리하는가 하면, 도심 내의 돼지 농장과 연계해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한다. 공동체 토지 신탁을 운영해 저소득층 주거문제에 앞장서는가 하면 교회나 항만같이 낡고 오래된 공간을 탈바꿈시켜 공동 실험장으로 운영한다. 겐트의 도시 커먼즈는 공동체에 대한 열린 지식을 바탕으로 자연과 공존하는 순환 경제의 지속성을 추구하며 인권과 윤리를 앞세운다.
자, 이제 다시 겐트의 일상으로 돌아가보자. 말하자면 나는 동시대 가장 활성화된 커먼즈의 도시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내게 된 것이다. 늘 변덕스러운 플랑드르의 날씨도 6월은 피해 가는지, 매일같이 쾌청했고 비를 뿌리는 날은 손에 꼽았다.
아침이 오면 자전거 도로가 보행자 도로보다 더 잘 정비된 길을 따라나섰다. 도시의 규칙에 익숙해질 즈음엔 전기 자전거를 빌려 타고 자전거 도로를 마구 누볐다.
Vertraag.
Uit verloren tijd kan zoveel moois groeien.
천천히 해요.
잃어버린 시간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아름다움이 자랄 수도 있습니다.
도시 곳곳을 수놓은 시적인 그라피티에 웃음 한 번 짓고, 버려진 공터에 어린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어린아이가 잔디밭에서 뛰어다니는 모습을 관찰하며, 매일같이 운하가 흐르는 항만으로 향했다.
현재 겐트의 항만은 'De Oude Dokken (오래된 부두)'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겐트의 주요 항구 'Houtdok' , 'Achterdok' 및 'Handelsdok'을 중심으로 2004년부터 도시 재생 사업이 진행 중이다. 프로젝트 목표는 오래된 항만 시설을 생활/업무/휴양 공간으로 조성하는 것.
부둣가는 한 때 전성기를 맞았던 산업 현장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19세기말부터 방직공장이 들어섰고 쉴 새 없이 배가 드나들었다. 북아프리카와 터키 등지에서 몰려든 이주 노동자들은 면직물을 생산하며 생계를 꾸려나갔고 섬유 산업은 다시 한번 겐트의 심장을 뛰게 했다.
탈바꿈 중인 항만 시설은 공사 현장과 실험 정신 가득한 입주민들이 뒤엉켜 어수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리는 부둣가를 오가며 운하가 흐르는 교량을 건너곤 했다. 자전거를 탈 때면 오돌토돌한 돌바닥 탓에 온몸이 통통 튀어 올랐다.
무엇보다 겐트에서 당연한 듯 매일 먹고 있었던 음식은 신선하고 깨끗한 제철 음식이었다. 겐트에서도 커먼즈가 가장 활성화된 분야는 바로 '먹거리'다. 겐트시는 'Gent en Garde'라는 플랫폼을 통해 공정하게 생산된 유기농 지역 식품 유통을 장려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속 가능하며 건강한 식품 생태계를 추구하며 도시와 농촌을 연계하여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좁힌다.
아직 할 이야기가 많다. 겐트에는 왜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없는지, 빨래통이 넘쳐야 겨우 세탁기를 돌리는지, 페트로 된 생수병을 꺼리는지, 도로에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많은지, 새로 집을 짓기 위해 수많은 절차와 행정이 필요한지, 하다못해 집수리에도 시 당국의 승인을 필요로 하는지, 동성 커플의 삶을 왈가왈부하지 않는지. 만약 겐트에 더 머물러야 했다면 서울의 생활 방식에 익숙한 우리는 조금 위축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불편함이 도시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지도. '지속가능하다'는 말은 다소 수고스러운 일상의 연속이란 걸, 불편한 일상들이 모여 도시에 새 물결을 일으킨다는 걸, 우리는 겐트에서 알게 되었다. '지속 가능성'이란 특정 개개인이 추구하는 이념이 아니었다. 겐트라는 도시 자체가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