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mmer May 26. 2020

냉장고 앞에 한참을 서 있다는 건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첫 소개팅을 하고 돌아온 날이었나? 뭐든 처음이 가장 어렵다는 말처럼 긴장도 많이 했었고 무엇보다 정말 기본적인 예의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과 마주했었다. 그날은 밥도 커피도 다 별로였고, 내 마음을 대변하듯이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엔 소나기도 내렸었다.


집에 돌아와 소개팅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차려입은 옷가지를 벗어버리고 뜨듯한 물에 샤워했다. 뜨듯한 물을 맞으며 한참을 넋 놓다가 나오니까 밥을 먹은 게 무색하게 허기가 졌다.


습관처럼 냉장고 문을 열고 냉기를 맞으며 서 있다가 문을 오래 열어뒀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뭘 먹지?’ 한칸 한칸 시선을 옮기다가 불투명한 락앤락 통에 자연스레 손이 갔다.


의식의 흐름대로 뚜껑을 열어 한 손에 쥐고 냉장고에 기대어 서서 내용물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아삭아삭 씹으면서 소개팅남을 생각했고, 그다음 아삭 거릴 땐 주선자를 생각했다.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과 양념의 짠맛이 입안에 퍼졌다. 어느 순간 꽉 막혀있던 속이 뚫리면서 소개팅남과 먹었던 파스타가 소화되는 기분이었다. 막혀있던 변기가 뚫리는 쾌감이라고나 할까? 점점 기분도 마음도 원래의 나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내 귀에 들릴 정도의 낮은 소리로 “소개팅 개새끼”라고 뱉은 후 뚜껑을 닫으려고 통을 본 순간 또 한 번 웃음이 났다. 분명 처음 열었을 때 가득 차 있었는데 불투명한 바닥이 보였다.

 ‘어?’


그랬다. 나는 늘 그래왔다. 몇 달간 밤잠 줄여간 시험에서 떨어진 날도. 회사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날도. 평생 함께하자고 약속했던 친구와 등졌던 날도 늘 냉장고 앞에서 익숙한 락앤락 통을 집어 들고 서서 속이 뚫릴 때까지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하…. 살겠다”라고 나도 모르게 내뱉는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꼭 불투명한 바닥이 보인 상태였다. 다시 넣어두기도 민망할 정도로 말이다. 귀찮아서 몰래 슬쩍 넣어두면 쏜살같이 엄마는 화를 냈다. 통을 바꾸던가 왜 자리 차지하게 이렇게 넣어두느냐고. 근데 이런 날은 엄마의 잔소리도 그냥 기분이 좋았다.


이상하게 뭔가 힘든 날, 위로가 필요한 날 그런 날 냉장고 문을 열면 늘 엄마표 오이고추 된장 무침이 있었다. 꼭 나를 위해 미리 준비한 것처럼.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라고 엄마에게 말하지 않을 거라고 티 내지 않을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행동할 거라고 했는데. 엄마는 내가 집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이. 그러니 조용히 먹고 기분 풀라고 말하는 듯한. 평소에 먹고 싶다고 할 땐 정말 들은 척도 안 하는 엄마인데. 그 반찬이 있는 시기엔 꼭 그렇게 위로가 필요한 일들이 있었다.


엄청난 재료가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냥 오이고추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후에 기름에 살짝 볶아주고 된장 한 큰술을 마지막에 넣은 후에 한 번 더 볶았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 그것만 있으면 될 거 같았다.


언젠가 엄마의 말처럼 만들기 간단한데.

요즘도 그런데.. 엄마 왜 안 해줘?

매거진의 이전글 그 많던 머위대는 누가 다 먹었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