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상했을’ 스튜
다큐를 시작하고 나서는, 스트레스가 쌓이는데 그 어떤 것을 해봐도 해소가 잘 되지 않았다.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곧잘 무언가를 만들어내곤 했다. 어릴 땐 아주 가끔 그림을 그렸고, 성인이 되어선 아무거나 프린트하여 가위로 사각사각 오릴 때도 있었고 구슬 꿰기를 하거나, 뜨개질에 빠져서 니트를 몇 벌이나 만들어 낸 전적도 있다.
하지만 그림은 딱히 재능이 없어서, 내가 생각하는 바를 구현해내지 못함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었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쏟아부은 노력과 시간이 아까워서 허무했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도, 실생활에서 쓰기에도 손이 가질 않아 물건만 쌓이는 것이 마치 털실이 (아주 비싼) 시체가 되어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찾다 찾다 요즘 몰두하고 있는 취미는 몽땅 썰어 다 넣고 끓이는 요리를 하는 것인데, 놀랍게도 나름 만족스럽다. 일단 ‘내가 먹을 것을 만든다’는 데에서 쓸데없는 물건들이 남지도 않고 맛있게 먹는다는 것은 결국 날 위한 일이기에 나름대로 위안도 됐다. 주변에 나눠주면 좋아하는 모습도 기분이 좋았다.
결국 삼계탕용 냄비를 하나 장만했다. 너무 커서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으면 까치발을 들어야 냄비 속이 보일 정도지만 만족스러운 소비다. 냄비를 사놓고 토마토 스튜를 끓이겠다며 소고기를 잔뜩 시켜 새벽배송으로 작업실에 보내놓았다. 아침에 작업실로 출근하려고 하니 몸이 너무 무거워 ‘뭔지 모르겠지만 지독한 것에 당해버렸다.’라는 직감이 왔다.
그 후로 하루종일 꼼짝 못 하고 침대에 누워서 끙끙 앓았다. 머릿속에는 따뜻하게 녹아가고 있을 소고기들이 떠올라 괴로웠다. 꼬박 하루가 넘는 시간을 밖에 소고기를 내버려 두자니 작업실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고기가 상하면 어마어마하게 역할텐데, 돈 날린 것도 너무 아깝고. 아, 음식물 종량제 봉투도 사야 하네. 뭔 짓거린지.
울고 싶었던 마음과는 달리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 고기 상태에 핏물을 빼고 요리를 시작했다. 고기 냄새가 나는 건지 원래 이런 건지 불안 불안했지만 버릴 순 없었다.
재료를 몽땅 넣고 끓이면서도, 이게 상한 걸 넣고 끓인
건지 아니면 이 정도도 괜찮은 건지 불안해서 한번 끓이고선 며칠간 맛도 보지 않았다. 그러니 또 작업실로 가서 냉장고를 열기가 근심스러웠다. 다 넣고 끓인 스튜를 다 버릴 생각을 하면 머리가 아팠고, 한 입 먹고 상한 맛에 역함을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자기 집 냉장고에 있는 스튜를 겁내는 집주인이라니.
요즘 한창 잘 지내다가 새벽에 잠깐 깰 때면 그렇게 허망한 기분이 들어 ‘이 시간이 견디기 힘들다’라고 생각했다. 해도 해도 쌓인 일들과 감정들을 처리하기 힘들어서 뭔가를 사각사각 썰고 볶고 끓여서 몸에라도 좋게 만드는 것이 스튜를 끓이는 일이라면, 그 스튜가 담긴 거대한 통을 열어 맛을 보는 것이 두려운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나 아무래도 상한 스튜를 8L짜리 냄비에 끓여놨어. 아니 스튜 자체가 8L는 아니고. 아마 고기가 상했을 텐데 그거 넣고 푹 고와서 육수를 뺐으면 아마 국물도 정말 끔찍한 맛이겠지? 고기의 맛은 아마도 ’ 과로로 인한 아픔‘의 맛이 날 거야. “
식중독 유발 수프를 누군가에게 대신 먹어봐달라고 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그런 스튜를 몇 리터씩이나 끓여놓고 외면하고 있다는 고백부터가 어려운 일이다. 스튜는 다행히 간을 맞추니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판명 났지만, 어째 마음속 냉장고의 8L짜리 냄비는 꽉 차서 움직일 생각도 없어 나를 불안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