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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에 Oct 08. 2023

영화는 시간을 거스르는 일

오랜만이네요

 저는 포스트 프로덕션 단계에 진입했습니다. 왜 진입이라고 말하냐 하면, 아직도 추가촬영이 남아있기 때문이죠. 결말까지 편집을 착실히 하다 보면 덧붙여야 할 것들도, 그리고 새롭게 반영해야 할 것들도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편집을 시작한 지 꼬박 한 달이 넘었는데도 그냥 '진입'이라고 말합니다.


 포스트 프로덕션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올 상상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개봉시기는 언제가 될지, 프리미어는 어디서 할지... 이 모든 것이 사실 제 작품을 좋게 봐주는 사람들이 최종 결론을 내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전략을 짜는 것뿐입니다.

불안할 때마다 써서 붙였던 포스트잇들

 시간이 쌓여 지금이 왔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사실, 이곳에 남긴 기록을 다시 읽는 것이 제겐 생소하기만 합니다. 작업을 시작하고 저는 실질적인 것들에만 매달려 왔기 때문입니다.


 작게는 내일 촬영을 해야 하는데 날씨가 어떨 것이며, 비가 오면 제작비가 얼마가 날아가는 것이고, 돈이 동나기 전에 어떤 곳에 가서 어떻게 자금을 끌어올 것이며, 어떤 제작지원 사업이 몇 월에 열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데 모든 생각과 체력을 바쳤습니다. 피칭 대본은 어떻게 쓸 것이며 비즈 미팅에선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제겐 모든 것이 전략이었습니다.

EIDF GPA에서 수상해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IDFA에 다녀왔습니다

 정작 작품을 생각할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독이 되어 제게 짐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 어느 곳에서 뵙건 제겐 매번 바빠 보이는 분과 대화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시간이고, 가장 좋아하는 일이기에 본인은 사실 일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녀가 책상에 앉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전하진 못했지만 저도 지금 여태껏 찍어온 클립들과 나 혼자만 마주 앉아 편집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전거의 도시


 오디션 프로그램을 좋아하시나요? 학창 시절 저의 가장 간절한 꿈은 배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가끔 다른 이들의 독백을 보고 있다 보면 이 짧은 몇 분 남짓의 시간을 위해 연구하고 연습한 시간들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참 신기합니다. 그래서인지 TV를 안보는 저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은 챙겨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쌓아온 시간을 보는 것은 참 즐거우면서도 감사한 일이기때문에요.


'보이지 않게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은 보이는 것이 된다.'


저는 그렇기에 영화는 시간을 거스르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만큼의 질 좋은 고민과 시간을 쌓아왔느냐가 결국 스크린 위로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사실은, 오로지 전략만 가득했던 지난 작업기가 걱정되기도 합니다.

피칭하러 온 DMZ영화제

하지만, 하나 다행인 것은 여태껏 제 알량한 머리로 짠 전략이 대부분 실패했기 때문에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두드려 맞았습니다. 그 시간이 작품에 대해 생각하기에 게을렀던 저를 많이 다그쳐서 억지로 부지런히 쌓은 것들이 그래도 있습니다. 그것들로 작품을 쌓아갑니다. 그리고 또 편집하다가 무너지겠지요. 또 쌓으면 됩니다.


피칭 바로 직전 백스테이지

 저는 영화 시작 하기 전엔 제가 정말 성숙하고 멋지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그 믿음이 처참히 두드려 맞는 시간을 쌓았습니다.


 그러니 비록 유약한 제가 만들고 키워냈다 하더라도, 혼자 서있을 수 있는 단단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만으로도 발전이라 부르겠습니다.


 시간이 조금씩 이 작품의 것이 아니라 저의 것이 되는 때가 오겠죠. 그때가 오면 몇 년간 쌓아온 저의 시간에 대해서도 쓰겠습니다. 그동안은 간간이 찾아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뵙게 되길.


*영화 다 끝낸 사람처럼 써놨는데 절대 아님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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