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 대학에 와서는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확실히 추한 외모에 대한 혐오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는 했다. 누구도 뚱뚱한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았고, 못생겼다고 앞에서든 뒤에서든 실명을 거론하며 헐뜯는 일도 없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이 더욱 노골적이어 졌을 뿐이다. 그러나 추함에 대한 비난이 내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슬프게 했다면,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과 칭찬은 스스로 더 예쁘게 꾸미고 사회적가 요구하는 이미지에 맞는 모습으로 만들도록 나를 길들였다.
선배들이 술자리에서 신입생 외모랭킹을 매겼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는 한편, 나는 당연히 그 안에 없을 거라고 우울하게 생각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그걸 우울하게 여겼다는 사실이 너무나 수치스러울 뿐이지만! 그때 느꼈던 우울함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기본적으로는 타인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성적인 욕구겠지만 그밖에도 오랜 시간 사회적으로 학습된 결과였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모든 이야기와 사건들은 보통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는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흥미로운 모든 일들이 앞으로 예쁘고 잘생긴 애들에게 일어나리라는 예감, 나아가 그 애들이 대학생활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 나는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마땅히 그 안에서 내가 누릴 최선의 시간들을 보내고 싶었다.
그걸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외적인 노력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성격이 원만하고 눈치가 빠르고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농담을 하고 분위기를 띄우고 과장해서 잘 웃지 않으면, 내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게도 재미있다는 얘기도 좀 듣고, 적극적인 성격 탓에 상황마다 잘 어울릴 수 있었지만, 좀 더 진지한 존재로 대우받기 위해서는 더 아름다워져야만 했다. 그래서 그 시절 내게 꾸미는 것은 단순히 예뻐지는 것이 아니라 내 사회적 가치를 증명하고 확신하게 하는 일이었다. 점점 화장하지 않으면 외출하기도 힘들어졌고,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게 되었다. 가끔 실수로 내가 찍힌 사진을 보면, 내 얼굴이 너무 보기 싫어 눈물이 터지기도 할 정도로 말이다.
화장을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잘 하면 좀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늘 아래 같은 색조 없다며 다양한 브랜드의 화장품을 세일기간마다 쓸어 담았다. 요즘 수술보다 시술이 대세라기에 그걸 하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윤곽주사와 보톡스를 맞으러 우리 집에서 2시간 걸리는 곳에 있는 피부과까지 정기적으로 다녔는데 그때 등록한 개인정보를 통해 아직도 세일 정보가 나에게 날아드는 중이다. 그밖에 속눈썹을 붙인다면? 눈썹문신을 한다면? 살을 뺀다면? 귀를 뚫어본다면? 머리를 기르고 염색을 해본다면? 같은 생각들이 뒤를 이었고, 놀랍게도 방금 나열한 모든 노력을 다 해보며 대학시절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