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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재 Dec 28. 2018

그와 당신의 거리

빛이 전달되고 기록되는 방법

  안녕들 하신가요. 인사말인 덕분에 한국인만큼 타인의 '안녕'을 자주 빌어주는 사람들도 또 없는 것 같아요. 제 개인적으로는 올해 그다지 안녕하지 못할 일이 많았는데, 그래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안녕하기를, 안정되고 평온하기를 빌었던 해였습니다. 벌써 연말이잖아요. 한 해 내내 '안녕'을 말했던 일들이 많이 떠오르네요. 그리고 올해를 2주도 채 남기지 않은 어느 날, 유난히 차갑고 가혹했던 이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헤어지기 싫었다기보다는, 헤어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와 작별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별과 달리 떠나는 사람에게 아쉬운 말을 붙일 수 없는 것은, 그 아쉬움이 결국 우리 스스로에게 돌아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결국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안녕' 뿐입니다.


 처음 보도를 접하고, 세상이 절망하는 것을 보며, 어떤 암담함을 느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을 마주한 사람들은 원망의 대상을 설정하기 위해 사건을 파헤치고 또 파헤쳐 원인을 찾곤 합니다. 하지만 파면 팔수록 깊숙이에 묻혀있던 것이 결국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임을 발견했을 때, 그 자괴의 순간을 어떻게 이겨내면 좋을지 몰라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 비극의 연쇄를 어떻게 끊으면 좋을지, 혹시 끊을 수 없는 것은 아닌지 고민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모두 멈추자고 하기엔, 이미 여기에 온 몸과 온 마음, 삶을 다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까닭에, 근본적인 회의 위에 어설프게라도 도피처를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어차피 부조리한 삶이라면, 그것에 거역하는 것이 삶에 대한 의지겠죠.


 아이돌은 다른 일반적인 연예인에 비해서도 꽤 어린 나이부터 연예계 생활을 시작합니다. 주변엔 말을 듣고 따라야 할 어른들이 더 많고, 비슷한 상황의 또래 친구들은 보거나 만나기 힘들뿐더러, 그마저도 '이미지를 위해 사람 가려 사귀라'는 충고들 때문에 쉽게 아무나와 교류하지 못하고 움츠러들죠. 사실 어린 나이의 아이돌이 생활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또래 사람은 '팬들'입니다. 팬들은 그렇게 아이돌에게 반려자이자 뮤즈가 됩니다. 팬들이 일상에서 종종 아이돌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만큼, 아이돌 또한 순수하게 팬들을 보고 싶어 할 때가 있지요. 큰 공연장을 가득 메워주기 때문이 아니라, 비싸고 좋은 선물을 많이 해줘서가 아니라, 박스를 쌓아가며 음반을 사줘서가 아니라, 주변에 '일'하는 어른들뿐인 아이돌에게는 어디서나 무조건 응원해주는, 일말의 안식처가 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팬들은 그런 아이돌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보고, 그 순간에 사랑에 빠집니다. 아이돌이 보내는 감사에 도취되는 경우도 있죠. 그래서 세상은 팬을 '어두운 이면을 모르는 바보' 취급을 하기도 합니다. 아이돌이 아무리 팬과 가까워지고 허물없이 지낸다 하더라도, 아이돌이 팬에게 먼저 현실적인 고충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호기심이 많은 팬은 아이돌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기록합니다. 그림자마저 아름답다는 찬사는, 그 그림자를 아주 가끔 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팬들은 그렇게 아이돌의 모든 것을 소장하고, 간직하고, 추억하고 싶어 합니다. 착하고 똑똑한 아이돌은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 어두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무척 실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팬들은 충분히 밝은 모습을 본 뒤에는 그 뒤에 깔려있던 그늘마저도 모아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충격 이후 며칠간, 아이돌을 잃은 팬들이 무엇을 가장 힘들어하고 있는지 조용히 지켜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다 함께 자책감으로 힘겨워하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팬들만이 하는 고민이 드러났습니다. 가장 빛나는 순간은 물론, 어둠마저도 사랑했던 팬들은, 이제는 빛도 어둠도 없는 세계로 떠난 아이돌이 남겨진 세상의 다른 빛에 잊힐까 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이 우울했다고 해서 그의 삶이 전부 어둠이었다거나, 그의 행보가 모두 고통이었던 것은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그를 그렇게 어두운 틀에 가둘 준비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팬들은 그렇게 그의 불행만이 기억되다가 결국엔 영영 잊혀 버릴 것이 두렵고 안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다른 이의 불행을 쉽고 간편하게 소비해버리는 법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팬들 또한 그런 소비에 익숙해져 더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에 자책하고 있었죠. 세상이 그렇게 좋아하던 누군가를 잊는다는 건 너무 무서운 일입니다. 세상이 누군가를 기억하거나 잊는 것, 혹은 어떻게 기억하는지가, 지금까지와 전혀 딴판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게 팬들에게는 무척 야속할 일입니다. 그렇게 소비되어선 안 되는,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고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 가치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팬들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사실 그렇지만은 않았다'라고 말해줄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진실은 팬들만이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팬들이 져야 할 책임이란, 그를 붙잡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 아니라, 적어도 팬들은 아직 그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세상에 끊임없이 말해줄 임무에 가까울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요. 재능 있는 음악가는 당연히 노래를 남길 겁니다. 그렇다면 그 노래가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불러줄 사람이 필요하겠지요. 모든 천재적인 음악은 그렇게 시간과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닿아왔습니다. 마치 창문 너머 푸른 밤하늘의 달빛이 무심한 듯 자연스럽게 우리가 잠든 침대 머리맡까지 와서 닿는 것처럼요. 그의 음악이 그가 사랑하고 그를 사랑했던 이들을 통해 앞으로도 긴 시간을 넘실대며 전해지기를, 그렇게 영원히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이 가장 처음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그 순간을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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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블로그에 2017년 12월 25일에 작성한 글을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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