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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재 Dec 20. 2019

'프듀'라는 시절

시리즈가 끝났어도 당장은 끝날 수 없는 '프듀 세대'

   2016년 엠넷 '프로듀스 101'이 첫 시즌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 프로그램을 K-pop 인프라 확장의 기회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엠넷의 '슈퍼스타K' 시리즈가 시즌을 거듭하며 화제성을 잃어간 대신 '프로듀스 101'이 '아이돌판 슈스케'로 여겨지기도 했고, 이를 '가요 시장이 아이돌 산업을 기준으로 재편되었다는 신호'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프듀'의 시작은 분명 봄이었다. 만 1년도 채 활동하지 못한 I.O.I는 트와이스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걸그룹으로 꼽히곤 했다. '프듀'가 얼마나 큰 파급력을 갖고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셈이다.


   2017년 5월에 치러진 대선과 정확히 시즌이 겹쳤던 '프로듀스 101 시즌2'는 아직도 가장 치열했던 시즌으로 꼽힌다. '프듀2'는 전 국민을 '투표에 미친 민족'으로 만든 주인공이기도 했고, 워너원은 I.O.I가 출연하지 못했던 지상파 음악 방송에 출연하게 될 만큼 무시무시한 인기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작년 여름에 시작해 초가을에 끝난 세 번째 시즌 '프로듀스 48'은 뜨거웠던 열기의 결실을 수확하듯 한일 양국에서 대형 팬덤을 구축했다. 아이즈원은 물론이고, '프듀48' 출신의 멤버들이 다수 속한 에버글로우, 로켓펀치 등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국내에서 만들어지는 아이돌 관련 컨텐츠 중 '프듀'를 모티브로 하는 것들도 상당히 많아졌다. JTBC '아이돌룸'의 경우 얼마 전부터 '프로젝트 아이돌 그룹을 만드는 오디션'이라는 포맷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프듀'가 조작 논란으로 오명을 쓰게 된 이후에도 방송에서는 종종 '픽'이나 '센터' 등 프듀가 유행시킨 단어를 들을 수 있다. 아이돌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스타도, 기획사가 잘 포장해 히트시키는 상품도 아닌, 철저히 대중이 평가하고 만들어낸다는 신화 또한 '프듀' 이후 강하게 통용되기 시작했다. 아이돌 시장에 '프듀'가 미친 영향이란 단순히 참가자의 향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드롬'을 넘어 새로운 문법을 만든 것이다.


'프로듀스' 시리즈를 통해 최종 데뷔한 그룹 I.O.I(아이오아이), 워너원, 아이즈원, 엑스원.


   그랬던 '프듀'도 끝내 차갑고 쓸쓸한 겨울을 맞았다. '프로듀스 X 101'은 앞선 세 시즌이 갖고 있었던 결점과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한 채, 누적된 피로감과 떨어진 신선도, 그리고 연장된 최종 데뷔 그룹의 활동 기간만큼 짧아진 참가자들의 연습 기간을 놓고 시작부터 비난을 면치 못했다. 사실 제작하는 입장에서 네 번째 시즌이 필연적으로 갖게 될 식상함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사람들이 이 네 번째 시즌을 첫 번째나 두 번째 시즌만큼 열광하게 하려면 차라리 국민 프로듀서 대표였던 이동욱이 드라마 '도깨비'에서처럼 시청자에게 일일이 이전 시즌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주문을 읊게 하는 게 빠를 것이었다.


   그러나 메인 PD였던 안준영이 진술한바, 프로그램과 데뷔 그룹의 흥행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사수해내야 했다. 줄어든 화제성, 적어진 시청자를 가지고 이전 시즌만큼의 결과물을 뽑아내려면 결국 충성 시청자층의 과몰입을 끌어내야만 했다. 즉, 100명의 대중이 1만큼의 관심으로 100을 만들어냈던 이전 시즌과 달리, 무조건 100 이상을 끌어내야 했던 마지막 시즌은 20명이든 10명이든 일단 모인 팬덤이 5~10씩의 역할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듀스 X 101'에서는 그런 고민의 흔적이 엿보이는 부분이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던 'X 데뷔' 규칙이었다.


'프로듀스 X 101' 생방송 최종 순위 발표식에서 X 데뷔 후보로 호명된 이은상(엑스원), 이진혁, 김민규, 구정모(좌측부터).


   마지막 4번째 경연인 데뷔 평가에서 4차 온라인 투표와 생방송 문자 투표를 합산해 데뷔 멤버를 가려냈던 이전 시즌과 달리, '프듀X'는 1~4차 투표 기간의 총 누적 득표수와 생방송 문자 투표까지 합산해 11번째 멤버를 선발하는 제도를 신설했다. '프듀X'를 시청하는 팬들은 이것을 '수시 제도'라고도 불렀는데, 이것은 마치 고등학교 3년 내내 준비해야 하는 대입 수시 전형처럼, 시청자로 하여금 프로그램 방송 기간 내내 투표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고, 한시도 '원픽'에 대한 지지를 늦출 수 없게 만드는 제도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제도 때문에 '프듀X'는 다른 시즌과 달리 '득표수'에 모든 관심이 집중된 시즌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사실 '득표수 조작'은 제작진이 노골적으로 팬덤을 기만한 사건이다. 득표수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만들고, 그 득표수를 조작했기 때문이다. 이 숫자로 연습생의 아이돌, 연예인으로서의 커리어, 크게는 인생까지 뒤집어질 수 있기에, '프듀X'는 베네핏 합산-제외 득표수, 실시간 누적 득표수, 연습생 간 득표 차 등, 팬덤 안에서 수치 데이터가 가장 빈번하게 공유된 시즌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득표수 조작을 저지른 것은,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보다는 차라리 '들켜도 뭐 어쩔 건데'와 같은 오만한 태도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2019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엠넷의 슬로건. 프로그램 시작 전 스팟 영상으로 등장한다.


   이 오만함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결국 어느 순간에도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국민 프로듀서'와 참가 연습생들이다. 전체 시즌에 걸쳐서 '사기극'임이 드러난 '프듀' 시리즈는, 네 시즌에 참가한 399명('프로듀스 48'에는 96명이 참가했다)의 연습생과 수많은 '국프', 그리고 K-pop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집단 경험을 선사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 위에 쌓이게 될, K-pop이 만드는 모든 기록은 의심받을 것이고, 그 눈초리는 얄궂게도 이 부조리를 만든 쪽이 아니라, 제작진과 소속사의 '큰 그림'에 맞춰 움직여졌던 399명에게 더 자주 향하게 될 것이다.


프로듀스 101 시리즈 출신자의 2019년 발표 음반 목록. 수동으로 집계해 누락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목록 크게 보기(구글 스프레드시트로 이동)]


   2019년 한 해 동안 음원, 음반 등을 발표하고 활동한 아이돌 중 '프듀' 출신은 약 70여 팀, 발표작은 117건에 달한다. 월평균 10장 정도의 음반이 나온 셈이다. '프듀X'가 종영한 지 얼마 안 된 12월에 집계했음에도 이 정도였다. 대부분이 시즌 1, 2 참가자였으며, 앞으로 데뷔할 48, X 출신까지 감안하면, K-pop 시장에서 '프듀'를 지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절대 지워질 수 없는 이 집단 기억을 트라우마로 만든 사람들이 누구인지 진지하게 고찰하고 엄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399명이 하게 될, 어쩌면 399번 이상이 될 수도 있는 데뷔 무대들이 감춰야 하는 흑역사가 아닌 '꿈의 무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프듀'는 겨울에 갇혀 다시는 봄을 맞을 수 없게 됐지만, 네 번의 시즌을 거쳐오며 '프듀'로부터 K-pop이 얻은 유산 또한 분명히 있다.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행복회로' 몇 가지를 꼽아보았다.


행복회로 1. '솔로 아이돌'의 경쟁력

   아마도 '프듀'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프듀'가 '포스트-슈스케'에 해당하기도 하는 덕분에 아이돌 시장에는 그룹 형태가 아닌 '솔로 아이돌'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기존 시장에서 솔로 가수는 아무래도 그룹에 비해서는 다양한 컨텐츠를 통해 화제를 유도하고 그를 통해 팬덤을 구축하기에는 불리한 모델로 간주하여 쉽게 제작되지 않았다. '프듀' 이전에 히트했던 솔로 아이돌이 아이유 정도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프듀' 이후 등장한 청하, 정세운, 하성운 등은 아이돌 시장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준 모델이 되었다. '프듀'가 한 명의 참가자에게 웬만한 그룹 아이돌보다 큰 팬덤을 만들어주는 플랫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행복회로 2. 성적충의 종말(feat. 기계 픽)

   '당분간 오디션 프로그램 제작을 지양하겠다'라는 엠넷의 선언대로, '오디션 프로그램'이 얼마나 허망한 게임이 될 수 있는지는 이제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순위'가 얼마나 의미 없고 '데이터'가 얼마나 조작하기 쉬운지도 사회적 학습이 이루어졌다. 최근 또다시 불거진 음원 차트 조작 논란이 이러한 회의감을 더욱 보태주고 있다.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하는 시장의 논리가 부패와 폐단을 만나면 적어도 수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한 반면교사라기엔 파장과 충격이 너무 크지 않은가.


행복회로 3. 4세대 개막의 전조

   K-pop 아이돌 마니아 사이에서 아직도 종종 논쟁점이 되는 것 중 하나가 '3세대론'이다. '2세대의 끝과 3세대의 시작을 어디에 둘 것이냐'를 놓고 벌이게 되는 논쟁인데, 2세대의 경우 1세대 아이돌이 해체하거나 활동을 중단하고 가요계 주류가 비-아이돌 쪽으로 완전히 넘어갔다가 다시 아이돌로 돌아온 시점을 기준으로 하지만, 3세대의 경우 2세대가 쇠락하지 않고 꾸준히 영향력을 미쳐온 탓에 구분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9년에 들어서야 드디어 '프듀'를 포함한 3세대 아이돌의 산물들이 종적을 감추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4세대 아이돌의 출현을 예고하게 되었다.

   3세대 아이돌이 데뷔 후 전성기 시절에 '프듀'를 거치며 고전했던 기억이 있다면, 4세대는 '프듀'를 통해 모두가 공유하게 된 경험을 토대로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아이돌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프듀'로 인해 통용되기 시작한 새로운 문법은 '프듀'에 출연하지 않은, 하지만 '프듀'를 보고 자랐을 아이돌과 팬덤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고, 이 영향력은 '프듀'를 겪지 않았거나 영향을 덜 받은 세대와 큰 차이를 만들게 될 것이다. 이 차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될지, 혹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악화할지는 4세대가 끝날 무렵 다시 한번 평가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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