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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죽지않는돌고래 Jan 23. 2022

샤인머스캣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승부처를 안다

새벽의육아잡담록

1.

최근의 일이다. 위층에서 우다다다다다다다다 소리가 들린다. 그제야 알았다. 전국체전 금메달을 노리는 아이의 발걸음은 소리부터 남다르다. 


2.

지금껏 우리 집은 잘 설계되어(?) 층간소음 제로인 아파트인 줄 알았더랬다(그럴 리가!). 알고 보니 윗집은 노부부가 살고 있었기에 그동안 층간소음이 없던 것이었으며, 아마도 타국 혹은 먼 곳에 사는 손주들이 오랜만에 놀러 왔기에 난 소리였다.


익숙지 않은 이 소리는 우리 부부가 지난 4년간, 단 한 번도 갖지 않던 의문을 품게 한다. 


‘그럼 우리 밑에 집은 지금까지, 도대체, 어떻게, 왜…?!?’ 


3.

거실을 매트로 덮었으나 집 전체를 덮은 건 아니다. 층간소음 방지에 명백한 한계가 있다. 아이란 인류의 공통조상이 최초로 이족보행을 시작한 날의 흥분을 그대로 간직한 족속이라 하루죙일 발뒤꿈치를 쿵쿵 찍어대기 때문이다. 


헌데 지난 4년, 아래층에선 단 한 번도 클레임을 걸은 적이 없다. 게다가 지금은 하나까지 생겨 별이 네섯개!, 아니, 발이 4개니 2배로 찍어대는데 말이다. 


21세기형 기적을 온몸으로 목도하고 있었는데 눈 있어도 눈 없는 자요, 귀 있어도 귀 없는 자가 나였던 게다.


4.

생각했다. 지난 4년, 정밀히 하면 아이가 걸으면서부터이니 약 3년 동안 이 모든 걸 감내한 인격자에게 존경을 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해서, 태어나 처음, 내 돈으로 샤인머스캣 한 박스를 샀다(글타. 내 돈으로 먹을 땐 포도, 부모님이 놀러 오실 때 아이들 먹으라고 사주는 게 샤인머스캣이다). 


하루의 손을 잡고 샤인머스캣 한 박스를 들고 가, 벨을 눌렀다. 과연 한눈에 봐도 인격+590, 인격 속성 강화, 인격 아우라 뿜뿜 최대치의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 많이 시끄러우실 텐데 미안하다며 하루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우리는 그냥 뛰는구나 해요. 별로 신경 안쓰니까 괜찮아요.’


하며 아이들 먹으라고 샤인머스캣을 거절하셨다. 


…!?!


거절…?!? 


5.

흔들린다. 샤인머스캣을 거절한다고…? 그것도 한 송이가 아니라 한 박스인데…?!? 나로선 분명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근 40년의 지혜를 짜내 고심 끝에 내린 판단의 1교, 2교, 3교를 거친... 최종본, 회심의 역작이라 불리는 선택, 그 자체였는데... 거절...?!? 아니, 그보다 세상에 이걸 거절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물러날 수 없는 승부처, 완력은 부족하지만 판단력으로 살아온 인생, 아이큐 검사도, 인적성 검사도, 죄다 아사리판이지만 판단력만큼은 전국 0.1%를 기록한 전무후무한 쏴나이, 나, 지금 여기에 있다. 


이건 함정이다. 흔들려선 안된다. 여기서 샤인 머스캣 전달에 실패한다면 이는 동네뿐 아니라 후세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다.


하루가 장성하고 또 장성해, 나도 죽고 아내도 죽고 본인도 늙어 손자 손녀들에게 둘러싸여 임종을 맞는 장면이 떠오른다.


‘내 아버지는… 층간소음에 관해선 전설적인 방치 플레이어였지… 그런데 그분도 순간적인 깨달음이란 미덕은 있던 모양인지 내 손을 잡고 아래층에 가시더군…. 헌데 상대방이 거절하자 샤인 머스캣을 낼름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지 뭐야… 


아버지는 떳떳한 명분보다는 비겁한 실리를 택한 것이지… 내 평생 가장 부끄러운 모습이었어. 나는 달콤한 샤인머스캣을 먹었지만 그것은 먹어서는 안 될 악의 달콤함이었던 게야… 그 달콤함에 매료되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그때.. 그때 그 샤인 머스켓을 먹지 말았어야 했어… 그건 우리 것이 아니었던 게야…’


6.

글타. 안 그래도 대대손손 대의에 몸들을 바치신 덕에 후손인 나로선 좀 짜치는 면이 있는데(유일한 감옥 무경함자), 여기서 나의 명성이 더 떨어지면 그야말로 지하…! 상장폐지…! 가문 열외…! 호적 제외…! 


하루를 본다. 멀뚱멀뚱 내 눈을 쳐다본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모든 것을 감내한 레전드 인격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관철시키는 모습을, 지금!, 내 왼손을 붙잡고 있는 자식의 눈에 남겨야 한다!


이것이 아버지란 이름의 죽지않는돌고래다…! 


7.

변수에 짐짓 당황했으나 상황 판단을 끝낸 나는, 한사코 죄송하다며, 도대체 어떻게 참으셨냐고, 샤인 머스캣 박스를 정중히 전달해 드리고 하루와 꾸바닥 인사하고 나왔다.


4년간의 기적에 대한 대가치곤 참으로 소박한 현물인 셈이다. 잠시나마 흔들렸던 자신에 실망했으나 언제나 마지막 승부에서만큼은 강한 내게 칭찬하고 싶은 날이었다.


그날 일기에 ‘나는, 인간의 길을 걸었다’라고 적었다. 


8.

이틀 후다. 


쓰레기를 버리고 집에 오니 문 앞에 종이봉투가 걸려있다. 딸기와 쵸코가 쌍으로 있는 롤케잌이 메모와 함께 있다. 샤인머스캣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격의 왕이시여...


...... 


아아. 샤인 머스캣 한 박스에 고민한 나는 얼마나 쫌생이였단 말인가. 인간은 덕이다. 과연 덕이다. 대인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뿐이다. 


다시는,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아버지가 되겠다, 강한 아버지가 되겠다. 그렇게 오늘, 옆에서 하루가 ‘아빠는 왜 이렇게 혼자서 많이 먹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쵸코 롤케잌을 먹으며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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