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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Jan 13. 2019

최소한의 미술사 서문

서양은 사실상의 승자이다. 우리가 편안히 안주하는 거의 모든 삶의 양식들은 패자인 동양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옷, 주거, 문화와 같은 생활양식 뿐 아니라 철학, 교육, 정치와 같은 사회 시스템 등도 모두 철저히 서양이 만들어낸 것이다. 동양은 근대 이후 서양의 거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고 동양이 원래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것들을 버렸다. 동양에서 전통문화가 가지는 의미는 아마 서양문화가 새로 세워지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정체성이라도 잃지 않기 붙잡은 얇은 끈 정도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 승리한 서양에 대해서 전혀 비판적 시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사실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고 복제하는 것은 매우 영리한 행동이다. 서양 자신도 과거에 그렇게 발전했으니까. 서양사에서 그토록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로마는 그들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었다. 로마는 그들이 힘으로 집어 삼킨 다른 민족들의 문화를 인정하고 배움으로써 제국을 창설할 수 있었다. 정체성의 혼란이 오더라도 앞선 문화를 받아들여 강해지지 않으면 소멸할 수 있으므로 이것은 어쩌면 '살아남은 역사'의 필연이기도 하다. 역사에서 태어났지만 흔적 없이 소멸해버린 문화가 얼마나 많았는가. 


서양 미술사 안에는 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중매체에 의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반 고흐 같은 서양 미술사의 거장들의 삶을 접하게 된다. 매체들을 통한 반복된 접촉으로 인해 우리는 이 거대한 천재들을 우리와 매우 가까운 존재들로 생각한다. 하지만 서양미술사는 철저히 백인 남성 중심의 문화였다. 그 거장들은 서양미술사 안에 있는 것이지 한국미술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서양미술사에서 한국이라는 아시아의 작은 국가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다빈치나 반 고흐 같은 여러 미술사의 거장들을 점으로 보고 서양미술사를 그 점들을 연결시켜 만든 긴 선으로 볼 때 이 선 안에 한국인의 점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없었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서양미술사를 우리의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본받으려고 했지만 그 아버지는 한국이라는 자식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듯 하다. 

미술의 세계에서 서양미술이라는 아버지는 죽지 않는 아버지이다. 그는 여전히 살아서 우리들을 압도하고 있다. 여전히 살아있으니 그의 유산을 상속 받을 수도 없고, 당연히 그의 후계자도 될 수 없다. 이 묘한 관계 속에서 지금도 수많은 동양의 예술인들은 서양으로부터 인정을 받기위해 노력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우세한 서양의 입장에서 동양의 야심찬 예술가들은, 때로는 그저 서양의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이국적 향신료 정도에 불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매정한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기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차라리 출가하여 스스로의 유산을 개척해나가는 것이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더 합당한 방법이 아닐까.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 좀 더 정확히는 우리 나라의 사람들이 시각예술의 세계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에 대해 좀 더 정확한 이해를 갖길 바라는 마음이다. 정확히 아는 것은 주체성과 연결된다. 정확히 알아야만 겉모습만 따라하는 가벼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주체성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시각예술의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미술을 교양의 수준에서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을 이해하는 것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말에는 '먹어 본다', '들어 본다'와 같이 어미에 '본다'가 붙는 경우가 많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아마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일 것이다. '듣다'와 '본다'는 완전히 다른 감각 동사인데 이걸 같이 사용하니까. '먹어 본다'를 영어로 표현 하면 eat-see 정도가 될까? 이 한국동사의 특징은 시각 정보의 중요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70%이상의 정보를 시각정보를 통해 얻는다고 한다. 사는 동안 우리는 눈을 통해 거의 모든 것을 경험한다. 젊은 남녀가 처음 서로에게 설레이는 것도 시각정보 때문이고, 맑은 저녁 하늘의 구름을 보며 가슴이 따듯해 지는 것도 시각 정보 때문이다. 

실용적인 입장에서 보면 별로 쓸모없는 것 처럼 보이는 미술이 지금까지 계속 발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렇게 인간이 시각정보에 의존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역사에서 수많은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보강하는 도구로 음악이 아닌 미술을 선택해온 것은 이러한 시각 의존성에 관한 통찰 때문일 것이다. 시각정보가 인간에게 이렇게 특별하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시각정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각예술, 즉 미술이 지난 수천년동안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술의 발전 과정에서 탄생한 수많은 예술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보면 하나의 문화 분야가 이렇게 까지 다양하게 분화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그 과정을 만들어온 예술가들의 상상력에 경이로움이 느껴지기 까지 한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이 이 시각예술의 발전사를 대부분 접해보지도 못한다는 것 자체로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은 우리가 평소에 음악을 들으며 즐기는 것처럼 우리의 짧은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것 중 하나이다. 하지만 현대의 미술은 즐기기 보단 뭔가 '이해' 해야 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일종의 지적인 사기이다. 왜냐하면 시각미술은 근본적으로 설명을 동반한 논리 구술로 이해하는 것이라기 보단 그냥 '보는 것'이고 또 어떠한 측면에서 보면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미술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지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직장인이든 노동자든 학생이든 정치인이든 사회의 어떤 계층이든 상관 없이 소탈하게 시각 예술을 즐길 수 있는데 도움이 되기를 마음깊이 바란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것은 이 책은 연대기순으로 서양 미술사를 다룬 책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편집에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첫째로 현대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미술은 아이러니하게도 '현대'미술이기 때문에 비교적 최근의 미술들을 앞쪽에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중세나 그리스 미술같은 과거의 미술들은 오히려 현대미술을 이해하고 나서야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순서는 내가 스스로 미술을 접하고 공부했던 순서와 거의 같다는 것을 말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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