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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Jan 11. 2019

번외 - 미술을 소유하는 사람들

Price of Art in capitalism

                                                     

     <윌렘 드 쿠닝의 'Interchange' 1955, 2017년 기준으로 가장  비싼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일상을 벗어나는 가격의 미술들

여기서는짧게라도 미술품의 가격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실제로 사람들이 근현대미술에 관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 중 하나가 과도하게 높은 미술품의 가격이기 때문이다. 우선 2017년을 기준으로 미술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작가들을 순위대로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1위 - 3300억     Interchange,   Willem de Kooning(윌렘 드 쿠닝) 

2위 - 2800억     The Card Players,  Paul Cézanne (폴 세잔)

3위 - 2300억    Nafea Faa Ipoipo(When Will You Marry?),  Paul Gauguin (폴 고갱)                       

4위 - 2200억     Number 17A,  Jackson Pollock (잭슨 폴록)


이렇게 높은 가격의 그림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미술에 대해 거의 혐오에 가까운 거부감을 갖기도 한다. 근현대의 그림들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데다가 이렇게 이해조차 안 되는 그림들이 수천억에 거래되는 것을 보면서 뭔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근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5장의 '모더니즘 페인팅'에서 최대한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근현대 미술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왜 미술이 이 정도까지 비싸게 거래되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게 된다. 상식의 수준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리 중요한 미술사적 의미가 있다고 해도 몇 억 정도라면 모를까 그림 하나에 몇 천억은 너무하지 않냐는 것이다.      


자본권력의 통제를 받는 미술 세계

현대에 미술이 이렇게 상식의 수준을 초월하는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것에는 자본가들의 개입이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본가들은 미술을 적극적으로 구입하기 시작했고 결국 가격도 그들이 결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왜 자본가들은 미술을 구매하기 시작한 것일까. 사실 자본가들이 미술을 구매하는 것은 역사에서 늘 있어왔던 현상이 비슷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난 역사를 보면 시대의 권력자들은 항상 미술을 소유해 왔는데, 현대에는 경제권력의 핵심인 자본가들이 미술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주체가 정치권력에서 경제권력으로 이동하였을 뿐 권력자들이 미술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완전하게 같다는 것이다.


왜 권력자들은 미술을 소유하려고 하는가

경제권력이든 정치권력이든 미술과 권력이 가까이 있는 것은 거의 전 시대, 전 세계에 걸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처럼 보인다. 어떤 시대나 문화와 상관없이 동일하게 발생한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동일한 특성이 발현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자들은 왜 미술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 장에서는 그 이유를 잠시 살펴보려고 한다. 어디까지나 '인문학적 상상력'의 영역에 머무를 수밖에는 없다는 한계는 있지만, 현대의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자본가들이 왜 높은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미술을 소유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디자인된 대로 살아간다

사자가 평생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양들이 평생 무리 지어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동물들은 각자만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이것은 그렇게 디자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개체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유전자에 그렇게 살도록 명령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인간도 결국 사자나 양처럼 어떤 식으로든 디자인되어 있을 것이다.     


인간의 속성,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라는 종은 어떻게 설계되어 있을까. 인간이라는 종을 규정하는 특성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사회성' 일 것이다. 인간은 시대, 인종, 문화 모든 것을 초월하여 반드시 사회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살아간다. 그리고 인류가 지금껏 이룩한 모든 문명들은 혼자의 힘이 아닌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만들어 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사회성이야말로 인간을 설명하는 여러 특성 중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와 고양이의 차이

인간이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 보면 좀 더 명확히 드러난다. 개와 고양이는 가장 대표적인 애완동물인데, 무리 생활을 하던 늑대에서 기원한 개는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고양이와는 행동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 개들은 주인을 오랜만에 그 반가움에 몸 둘 바를 몰라할 만큼 주인을 반기는 반면, 고양이들은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적극적으로 주인을 반기지는 않는 편이다. 또 고양이들은 혼자 놔두어도 혼자서 잘 노는 편이지만 개들의 경우는 자주 산책을 시켜주거나 놀아주지 않으면 '개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개와 고양이가 이렇게 행동 방식이 다른 것은 개들이 더 높은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연결시켜서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사회성이라는 것은 쉽게 표현하면 무리 생활을 하는 본성이다. 무리 생활 본성이 있기 때문에 주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고, 또 무리로부터 고립되면, 그러니까 주인과 분리되면 불안해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개들이 혼자 방치될 때 생기는 우울증은 무리 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일 수도 있다. 개체가 무리로부터 홀로 떨어져 있으면 생존에 위기를 겪을 수도 있으므로 개의 유전자는 우울증이라는 방어기제를 만들어서 반드시 무리로 돌아가도록 강요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개와 고양이의 차이, 이는 집단생활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고양이는 개와 조금 다르게 행동한다. 우리는 농담으로 우리가 고양이를 키운다고 하지 않고 우리가 고양이의 '집사'로 고용되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아마 이런 농담을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시간과 돈을 들여 고양이를 키우지만 그 노력에 비해 주인대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양이들은 아무리 주인이라도 막상 자기 맘에 안 들면 주인에게 발톱을 세우고 할퀴기도 한다. 이는 아마도 고양이가 본질적으로 '주인'이라는 상하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개들은 무리 생활을 하던 늑대에서 기원한 동물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열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고양잇과 동물들은 야생에서 보통 혼자 생활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고양잇과 동물들의 뇌 속에는 사회성 개념이 없다고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야생의 고양이라 할 수 있는 호랑이의 경우 평생 혼자 어슬렁거리며 산을 쏘다니면서 살아가지만 평생 홀로 살아도 우울증에 걸리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늑대들은 반드시 무리를 지어 다니는데 이것은 호랑이와 매우 대조적이다. 무리 생활 본능을 가지고 있는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톰행크스 주연, 2000)’에서 나왔던 ‘윌슨’>

인간은 무리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인간은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고양이보다는 개에 더 가까운 동물이다. 인간은 어디에서나 반드시 무리를 지어 살아가고, 혼자 있을 때는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느낀다.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이라는 고통은 어쩌면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무리로 돌아가서 더 안전하게 생존하라고 강요하는 뇌의 방어기제일지도 모르겠다. 반면 산속에서 평생 혼자 살아가는 호랑이의 경우는 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호랑이의 자아가 되어 볼 수 없기 때문에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없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전혀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이 완전히 혼자서 살아갈 때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는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에 잘 묘사되어있다. 비행기 사고로 인해 무인도에 혼자 표류한 주인공은 가지고 있던 배구공에 사람 얼굴을 그리고는 '윌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친구를 삼는데, 배구공을 친구로 삼는 이런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무인도에서 느끼는 극도의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짜 친구라도 만들려고 하는 사회성의 발현인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바다에서 그저 배구공일 뿐인 친구 '윌슨'을 실수로 빠뜨리고 점점 멀어지는 배구공을 보며 오열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가죽 조각에 불과한 배구공을 놓치고는 평생의 친구를 잃은 것처럼 목 놓아 우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행동이지만, 이런 주인공을 보며 많은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을 하고 심지어는 같이 울기도 한다. 주인공의 외로움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대인들이 갈수록 우울증에 많이 걸리는 것은 개인주의의 발달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인류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 개인주의를 발달시켰지만 어쩌면 개인주의가 없던 과거보다 더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무리 생활을 하는 늑대들은 ‘서열’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무리 생활하는 동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생한다>

서열화

사회성, 그러니까 무리 생활을 하는 본능은 이렇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이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파생되는 문제들이 생기게 되는데, 이 무리 생활에서 나타나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서열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을 포함하여 무리 생활을 하는 모든 동물들은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반드시 서열을 가지고 있다. 왜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에게서는 서열화가 발생하는 것일까.

무리 생활을 하는 야생 늑대들의 상황을 한번 가정해 보자. 어느 고요한 밤, 산속의 늑대 무리가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 공동으로 사냥에 성공한 늑대들은 이제 사냥한 사슴고기를 분배해야 할 텐데, 늑대들은 어떤 방식으로 분배하게 될까. 늑대 공동체가 평등하고 민주적으로 고기를 나누어 먹을 리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서열상 제일 강한 우두머리가 먼저 먹고, 그다음의 서열 순서대로 남은 살들을 차례로 먹게 될 텐데, 이런 먹는 순서가 어찌 보면 '서열화'의 본질일 수도 있다. 조직 내에서 다른 개체들보다 조금이라도 강해야 자기가 먹을 차례가 돌아오는 것이다. 고기라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정된 자원은 개체들 간의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결과적으로 개체들 간의 서열이 정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회 내에서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로 올라가길 원하는 것은 어쩌면 비슷한 이유에서 근원한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쉬고 싶고, 놀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든 억제하면서 노력하여 남들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늑대들과 비교해 보면 늑대들이 다른 개체보다 높은 서열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늑대들이 무리 안에서 다른 늑대들을 밟고 높은 위치를 차지하여야 살점 한 점이라도 더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도 열심히 노력하며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위치를 차지해야 사회 내의 한정된 자원 안에서 더 많은 부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고기'가 부족하지는 않다. 늑대처럼 먹을 것이 실제로 부족한 것은 아니니까 원칙적으로는 생존을 위해서 남들을 짓밟으면서 까지 성공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아무리 자원이 풍족한 상황이라고 해도 반드시 경쟁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아마 이미 그렇게 살아가도록 유전자에 '명령'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원시 시절 최초로 무리를 지어 살아갈 때는 늑대들처럼 한정된 자원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서열화가 발생한 것이겠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것이 유전자 안에 완전히 각인되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느냐 아니냐 와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서열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전자의 각인 - 불필요한 상황에도 발현하는 서열화 현상

인간의 서열화 현상은 실제로 불필요한 상황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 사이에서 자주 발생하는 따돌림 현상도 일종의 불필요한 서열화의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 사이의 따돌림 현상은 전 세계에 예외 없이 똑같이 발생하는데 우리는 매스컴에서 약한 학생이 따돌림으로 인해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안타까운 사건도 종종 보게 된다. 보통 따돌림의 피해자가 되는 약한 학생들은 실제로 어떤 잘못을 해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따돌림 현상은 힘이 강한 학생들이 약한 학생들을 '그냥 이유 없이 괴롭히는 것'에 가깝다. 약한 학생을 괴롭히는 강한 학생들은 괴롭힘으로 인해 '심적 쾌감'이라는 보상을 얻게 되는데 이 보상은 서열 상승에 따른 유전자의 보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학급은 야생이 아니므로 서열 상승을 이룬다고 해도 특별히 차지해야 할 고기가 더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은 필요가 아닌 그저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학급 내에서는 특별히 힘의 논리로 경쟁해서 차지해야 할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학급 내에서 '힘에 의한 서열화'가 발생하는 것은 아마 유전자에서 그런 행동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다. 그러니까 인간사회에서의 서열화는 목적이 없는 경우에도 반드시 나타날 만큼 강력한 유전자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조금 넓은 시각에서 보면, 도서관에 밤늦게 까지 남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안경 낀 약한 학생, 그러니까 방금 전까지 따돌림의 피해자가 되었던 그 약한 학생도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학생과 근본적으로 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방법만 다를 뿐, 두 학생 모두 무리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본능을 실천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는 것이다. 불량학생들은 물리적 힘으로 '당장' 남들보다 우위에 서려고 한다면, 안경 낀 약한 학생은 당장은 얻어맞더라도 공부해서 '먼 장래'에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위치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기만 차이가 있을 뿐 남들보다 높은 서열을 차지하길 원한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는 같다는 것이다.      


무리 생활과 서열화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다

이렇게 인간은 매우 강한 사회성을 가진 동물이다. 우리가 늑대들처럼 무리 생활을 하고 살아가는 것은 늑대의 유전자가 그렇게 디자인되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유전자 안에 '무리 생활 습성'이 디자인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리 생활을 지시하는 유전자의 명령을 거부하려고 하면 거기에 따른 처벌, 예를 들자면 외로움이나 우울증 같은 고통이 발생하게 된다. 물론 무리 생활을 버리고 도인처럼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 인간의 대단한 점이기는 하지만 본능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젊은 학생들이 카페나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또 이미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직장인들도 잠을 줄여가며 틈틈이 영어를 배우거나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사회성과 이에 따른 서열화 압박 때문이 아닐까. 개인의 노력을 '자아실현'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개인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항상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서열화 우위'를 차지하도록 만들어 준다.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남들보다 높이 올라가길 바란다는 것은, 조금 더 좋은 대학에 간다거나, 좀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간다거나, 남들보다 좀 더 좋은 연구 성과를 낸다거나, 남들보다 더 좋은 미술이나 음악을 창조하여 명성을 얻는다거나, 정치적 정적을 누르고 당선된다거나 하는 사회적 성공뿐 아니라 일상에서 독서 등을 통해 지적 수준에서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길 바라는 것이나 운동이나 게임을 잘해서 남들보다 뛰어나길 바라는 사소한 취미 활동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세상에 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지기 싫어하는 것 자체로 이미 사회성과 이에 따른 서열화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남들보다 높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을 없앤다는 것은 하루하루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일본의 히키코모리처럼 사회와 완전히 단절하고 살아가는 극단적인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고 싶고, 쉬고 싶은 사소한 욕망들을 어떻게든 제어하며 하루하루 노력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사회 서열에서 한 계단이라도 올라가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며 산다.'

인간의 모든 노력이 이렇게 공동체 내의 서열 상승을 위한 목적뿐이라고 하면 너무 슬프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치, 경제, 과학, 예술, 그리고 일상생활 그 어떤 분야에서든 인간은 자신의 노력에 대한 대가로 사회적 위치라는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사회적 위치 같은 것은 상관없고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한다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정확하게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게 되니까 이 역시도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인간은 이렇게 평생 사회적 위치에 민감한 존재다.      

 

권력자들은 미술을 소유한다

인간의 사회성 본능을 우선 이야기한 이유는 이 인간의 강력한 사회성이 미술의 발전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강한 사회성은 결국 어떤 개인이든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의 '피라미드' 구조의 정점으로 가는 것을 강하게 욕망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강력한 본능인 만큼 이렇게 사회구조의 정점으로 올라서길 바라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려고 하는데 때로는 미술이 사회의 계급을 규정하는 방법으로 이용되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발달한 문명국가들에서는 예외 없이 항상 미술도 같이 발전해 왔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어느 문명에서든 미술의 소유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최고 권력자들이었다. 무리 생활에서 '서열'상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만이 미술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빌론과 이집트의 황궁 미술, 로마 귀족들의 그리스 미술품 수집, 미켈란젤로를 고용한 중세 교황청, 왕정시대의 궁정 미술 등, 차례차례 역사를 살펴보아도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 예외 없이 최상위 계층의 사람들은 미술을 그들의 곁에 두어 왔다. 꼭 발달된 문명이 아니라도, 작은 단위의 부족사회에서조차 역시 미술은 권력자들이 소유하고 있다. 과거 아프리카 지역의 마을 단위의 작은 부족들을 보면 여러 가지 미술 공예품으로 가장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부족 내에서 가장 힘이 강한 부족장이나 제사장들이었다. 

이렇게 거의 모든 역사에서 미술은 항상 권력에 가까이에 있어 왔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면, 미술이 권력을 탐닉했다기보다는 권력자들이 미술을 탐닉한 것으로 보인다. 먹고 살 방법이 없는 예술가들은 현실적으로 힘이 있는 후원자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런 일종의 '공생관계'가 계속되어온 것이겠지만, 예술가들이 권력의 입김과 무관하게 순수하게 예술을 창조한다고 해도 어김없이 권력자들이 찾아와서는 미술을 그들 가까이로 끌어들이곤 해왔다. 

이렇게 사회 서열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 미술을 그들의 곁에 두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 일까. 권력과 예술이 가까운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거의 전 시대, 전 세계에 걸쳐 역사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권력이 미술을 소유해야 할 어떤 목적이 있을까.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

민주주의 이전의 세계에서의 권력자들, 그러니까 왕이나 황제들은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권위를 사용하여 왔다. 권위가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해 주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복종할 때 의외로 통치자의 능력이나 자질보다 통치자의 권위 즉, 자신과의 서열 차이를 더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사실 현대에도 마찬가지인데 법적으로는 만민이 평등한 현대를 사는 우리도 알게 모르게 상대방의 계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간다. 이런 예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만약 어느 거지가 우리에게 '저기 있는 쓰레기 주워!'하고 명령하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것이다. 하지만 만약 학교 선생님이든 교수님이든 직장 상사든, 자신보다 직접적으로 서열상 높은 지위에 있는 어떤 사람이 쓰레기를 주우라고 하면 그냥 순종하는 경우가 많다. 쓰레기를 줍는 행위 자체만 보면 '옳은 행위'이므로 사실 누가 말했느냐 와는 상관없이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해야겠지만, 우리 인간은 사실 도덕적 당위성보다는 권위에 더 순종하는 경향을 보인다.

고대의 통치자들이 이 권위를 세우기 위해, 말하자면 권력과 평민들 사이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방법 중 하나는 자신을 '신의 아들'로 포장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황제들은 반드시 태양신의 아들이라는 통치 명분을 얻고 통치를 하였고, 꽤 합리적인 정치 시스템을 가졌던 로마에서 조차도 황제들은 자신을 '비너스 여신의 먼 손자'라던가 '전쟁 신 마르스의 아주 먼 손자'라던가 하는 식으로 자신의 혈통을 '신의 후손'으로 위장하여 통치 명분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신의 후손이라는 것만큼 확실한 계급 설정은 없으므로 거짓 혈통이라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계급의 격차를 벌리려는 노력은 실제로 국정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물론 국정이 안정된다는 것이 평민들의 삶의 질이 좋아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현재의 권력을 끝까지 유지하고 누리길 바라는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이렇게 자신과 평민들 사이의 계급 격차를 벌리기 위해 사용하는 또 다른 방법은 자신과 주변을 시각적으로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이다. 작은 부족의 족장이든 큰 제국의 황제든 상관없이 어느 집단의 최고지도자들이 자신의 몸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인데,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된 의복이나 관뿐 아니라, 크고 화려한 왕좌와 그 주변의 장식들, 그리고 거대한 궁전이나 성 같은 건축 등 통치자들은 항상 '시각적인 무언가'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과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친다거나 신으로부터 직접 왕권을 인정받았다고 하는 식으로 통치 명분을 꾸며내는 것을 '이론적인 서열 차이 벌리기'라고 한다면, 왕관, 화려한 의복, 보석으로 장식된 의자, 왕궁 등으로 통치자가 자신 주변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시각효과를 이용한 서열 차이 벌리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왕관 – 미술은 권력을 타고 성장한다. 유럽의 미술과 비교해 보아도 신라의 왕관은 탁월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미술은 보통 이러한 흐름을 타고 발달하게 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대에 발달한 문명의 미술이라고 이야기하면 대부분 왕과 귀족들의 장식품이나 소장품인 경우가 많다. 왕이나 귀족들의 의복, 또는 궁전이나 집을 장식할 여러 미술품들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더 확고하게 유지시키기 위해 필요하고, 이렇게 화려한 이미지들은 결과적으로 권력과 피권력의  심리적 거리를 더 벌리는데 도움을 주므로 미술은 자연스럽게 권력 중심으로 발달하는 것이다. 또 반대로, 최고의 권력자들은 귀족과 같은 자기 아래의 권력자들의 화려한 장식을 억제하는 것으로 권력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밀란 대성당, 이탈리아, 14~16세기, 중세미술이 교회를 중심으로 발달했다는 것은 중세의 진짜 권력은 교회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이기도 하다>

권력 중심으로 발달하는 미술

이런 예는 역사에서 무수히 많지만, 미술이 권력을 중심으로 발달한다는 것은 특히 중세의 미술에서 잘 드러난다. 중세는 철저하게 기독교 중심의 시대였는데, 중세에도 분명히 왕들은 있었지만 왕궁 미술은 별로 발달하지 않은 것이 특이한 점이다. 중세미술을 대표하는 것은 보통 중세미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바실리카(성당) 건축과, 성당 안의 장식들, 조각들, 장미 창, 그리고 성경필사본 등과 같이 거의 전적으로 기독교에 관한 미술들이다. 

그렇다면 왜 중세에는 왕궁 미술보다 교회미술이 더 발달했을까. 우리가 세계사 수업에서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불리 우는 사건을 배우는 것은 이 사건이 중세만의 독특한 권력 구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같은 시기의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오 7세에게 종교 파문을 풀어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교황이 거처하는 카노사 성 문 밖에서 눈을 맞으며 3일 동안 무릎을 꿇고 간청한 사건이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황제가 종교권력에게 무릎을 꿇고 굴욕을 당한 것이다. 현대로 치면 대통령이 대형교회 목사에게 3일 동안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무릎을 꿇고 빌은 것과 비슷한 느낌인데, 현대의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사건이 중세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교황으로 대변되는 중세의 '종교 권력'이 왕들의 '세속권력'을 훨씬 초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보면 중세의 미술이 교회들을 중심으로 미술이 발전했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미술은 권력 중심으로 발전한다'라는 가정과 앞뒤가 정확히 맞는다. 중세의 실제 권력은 왕이 아닌 교회였으므로 미술도 교회미술 중심으로 발달하였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당연히 역도 성립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중세의 역사를 전혀 모르고 당시 교황과 왕 사이의 권력관계를 전혀 모른다고 해도, 중세의 미술품들이 거의 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파악한다면 자연스럽게 '중세의 진짜 권력은 기독교였겠구나'라고 역으로 추측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대의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중 누가 진짜 권력자인가

그렇다면 현대에 누가 미술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알면 역으로 누가 현대사회의 '진짜 권력자'인지 추측할 수 있을까?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현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미술품의 소유자들은 정치인들이 아닌 대부분 자본가, 기업 총수들이다. 물론 북한이나 일부 중동의 국가와 같은 독재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정치권력들이 예술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미술품은 자본권력이 소유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진짜 권력자들은 정치인들이 아닌 자본가들로 봐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각자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겠지만 '미술품의 소유자가 진짜 권력자이다'라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현대사회에서 실제로 미술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 권력들은 어쩌면 정치권력을 초월하는 '진짜 권력' 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학자들은 정치권력은 그저 자본권력들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표현하기도 하니까.     


미술을 소유하는 자가 권력자이다

어쨌든 현대사회에서 미술은 자본가들의 손에 있다. 현대사회의 거대한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그 정점에 있는 자본권력들은, 지난 역사에서 과거의 다른 권력자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미술을 소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자본가들 역시 과거의 권력자들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권력을 보조해주는 도구로써 미술을 소유하길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과거의 권력들은 예술가들을 직접 불러서 자신과 주변을 장식할 미술을 제작하기를 명령했다면, 현대의 자본가들은 미술품을 마켓에서 쇼핑으로 소유하는 좀 더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미술과 권력의 관계, 즉 미술품들이 권력자들의 '지위를 유지시켜주는 도구'로써 작용한다고 가정하면 현대 미술의 가격이 높은 것은,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완전히 합당하다고 봐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권력의 높이를 결정하니까 '높은 가격의 그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사회적 계급이 높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높이길 원하는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그림은 과도하게 비쌀수록 오히려 효율적인 것이 된다.     


사람들은 왜 비싼 미술품을 구매하는가?

이 장에서는 예술품의 가격이 비싼 이유를 인간의 사회성, 즉 무리 생활 본능을 바탕으로 추론해 보았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1. 인간은 강한 사회성을 가진 동물이다.

2. 사회성 본능은 인간이 무리 내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싶어 하도록 명령하는데, 때로는 미술과 같은 '시각적 도구'를 자신의 서열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3.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권력자들인 자본가들은 비싼 미술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소유한다. 


자본주의 안에서 일어나는 미술품 구매를 인간의 사회성과 연결시켜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실제로 수백수천억에 달하는 상식의 차원을 뛰어넘는 미술품 거래를 다른 방법으로는 쉽게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에는 예술품 구매를 투자의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하는데(예술이 투자의 목적을 가지기 시작하는 현상 역시 역사에서 처음 나타난 일이다), 예술품이 투자로써의 역할을 하는 것 역시 예술품 가격 상승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지만 이 역시도 수천억에 달하는 미술품 거래를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자본가들은 실제로 매우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이 수백수천억에 달하는 가격을 지불할 때는 어떤 의미에서든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지불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인간의 모든 본성 중 가장 강력한 본성, 사회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에서 권력자들이 항상 시각미술을 그들의 권력 안쪽으로 끌어들여 이용하여 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현대 자본가들의 예술품 구매가 그들의 권력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논리 비약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권력자들이 미술가들을 가까이로 불러서 만들라고 직접 지시했다면, 자본주의에서는 그냥 '구매'하는 간편한 방식으로 변화했을 뿐 본질은 비슷하다는 것이다. 권력이 미술을 가까이한 것은 인류 미술사에서 한 번도 빠짐없이 계속 반복되어 나타난 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미술품 구매를 권력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한 번쯤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누구의 것이 되어야 하는가

역사적으로 미술은 항상 힘 있는 자들의 곁에 있어왔다. 하지만 역사에서 유명했던 여러 예술가들을 한 명 한 명 살펴보면 그들은 권력과 무관하게 순수한 마음으로 창작해 온 것으로 보인다. 예술가들 자신은 순수성을 지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가들의 순수성과 상관없이 예술의 소비층은 항상 사회의 상층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 문제 이기 때문에, 예술가들 사이에도 여전히 이러한 논쟁이 있다. 미술은 대중을 향한 것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어차피 사회 권력의 상층부에 의해 소비될 테니 소수 지배층을 향해야 하는가.

양쪽 모두 일리가 있다.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적어도 법적으로는 모두 평등하며 시민들이 사회의 주인이므로 미술은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논리와, 아무리 그래도 자본에 따른 사회계급은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실제로 미술을 구매하고 즐기는 계급은 결국 상위계층들이므로 그들을 향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 이상과 현실의 괴리쯤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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