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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Dec 27. 2018

고흐와 피카소, 직관과 이성

Intuition and reason


<파블로 피카소 '만돌린을 든 소녀' 1910, 반 고흐 '오디나무' 1889>


피카소의 이성과 고흐의 직관

피카소의 입체주의는 세잔Paul Cezanne의 미술을 연구하고 심화시키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입체주의의 탄생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지만, 입체주의는 어떤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발전시키면서 나타난 그림이라는 점에서 논리나 이성적 사고를 많이 활용한 미술로 보인다.

반면 고흐는 어떤 그림이든 이성보다는 그의 감성을 더 많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강한 느낌은 피카소와 비교해보면 뜨겁다고 표현해도 될 듯한데 피카소의 예술이 이성적이었다고 한다면 고흐는 반대로 감성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예술이든 이성과 감성의 경계를 칼처럼 나눌 수야 없겠지만 어느 정도 경향성은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고흐가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한 감성의 정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성을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것' 정도로 표현한다면 감성의 정체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할 방법이 있을까. 

고흐가 사용했던 감성을 설명하기 가장 적절한 단어 중 하나는 '직관Intuition'이다. 직관은 어떤 '순간적인 감'같은 것인데 언어로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직관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볼까 한다.


<테니스공 잡기>

공 잡기 놀이

아이와 엄마가 테니스공을 주고받는 놀이를 하고 있다. 공 잡기 놀이는 어린아이라도 어느 정도만 연습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쉬운 놀이이다. 그렇다면 이 공 잡기 놀이를 로봇에게 시킨다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 

공을 잡는 행위 자체는 얼핏 보면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이를 로봇에게 구현시키려고 하면 여러 가지 복잡한 공식과 계산 과정들이 필요하다. 로봇은 사람처럼 '감'으로 공을 잡을 수는 없기 때문에, 공의 속도나 공기저항, 중력 등 여러 가지 계산을 하고 나서야 공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린아이가 공 잡기 놀이를 할 때는 여러 물리법칙을 복잡하게 계산하면서 잡는 것은 아니므로 로봇보다 낮은 지능을 사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로봇에게는 수많은 수학공식과 물리법칙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공 잡기를, 사람들은 그저 '감'으로 해낸다. 그 '감'이 일종의 '직관Intuition'이다. 


어림잡기

다른 예를 들어보자. 어느 경험 많은 인테리어 사장이 새로 공사할 가게를 둘러보고 있다. 천천히 가게를 둘러보던 사장은 옆에 있던 부하 직원에게 조용히 말한다. “6000만 원.” 사장은 총 공사비용을 어림짐작으로 맞춰본 것이다. 이런 방식의 어림잡기는 우리도 장을 보러 갈 때나 여행을 갈 때 등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총 공사비용 견적을 컴퓨터에게 산출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건물의 면적, 자재, 인건비, 기간, 예비비 등 수많은 변수를 다 기입해야만 비슷한 견적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꽤 복잡한 변수가 있는 계산을 연륜 있는 사장들은 가게를 대충 둘러보는 것 만으로 가능한데, 굉장히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 감에 의한 '어림잡기'도 일종의 직관이라고 할 수 있다.


<바둑은 전체 판세를 읽으면서 둔다. 이 능력은 '직관'에 가깝다>

바둑

한 가지만 예를 더 들어보자. 2016년에 한국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 있다.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와 이세돌 9단의 바둑대결이다.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과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이세돌 9단이 알파고를 이길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유는 바둑이라는 게임의 특성 때문인데 바둑은 얼핏 보면 단순한 게임인 것 같지만 19 ×19 크기의 바둑판에 흑과 백이 차례로 수를 두는 경우의 수는 10의 700승이 넘는다. 

10의 700승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과학자들은 우주에 전체에 퍼져 있는 모든 원자의 개수를 다 합하면 10의 80승개 정도 된다고 본다. 그러니까 10의 700승이라는 숫자는 인간의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도의 경우의 수라면 지구 상의 모든 컴퓨터를 전부 동원한다 해도 절대로 계산해 낼 수가 없다.

과학자들이 바둑에서 만큼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길 수 없다고 예측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장점은 빠른 연산인데, 아무리 연산이 빨라도 10의 700승은 전부 계산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바둑 두는 방식을 따라 해야 할 텐데 아직까지는 그 방식을 따라 할 수도 없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방식을 따라 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알파고의 출현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진지한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따라 하고자 했던 '인간의 바둑을 두는 방식'은 무엇일까. 바둑은 단순 수 계산으로 두는 게임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 계산을 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판세를 보면서 어느 특정 지점에 수를 두는 것이 판세에 유리할 것 같다는 '감'을 가지고 수를 둔다. 이 바둑에서의 '전략적 감' 역시 일종의 직관이다. 

     

직관의 평범성

인간의 직관에 관한 예는 들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부터 전문 분야에 까지 여러 상황에서 직관을 사용하며 살아간다. 요리를 하면서 무슨 재료를 더 넣을까 고민할 때도, 카페에 앉아서 우연히 지나가는 매력적인 이성을 쳐다볼 때도 우리는 직관을 사용한다. 직관은 이렇게 평범하다. 어쩌면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생각조차 못하는 것 인지도 모른다. 

직관을 최대한 언어로 풀어서 얘기하면 '여러 가지 복잡하고 다양한 정보를 취합해 순식간에 처리하고 판단하는 과정' 정도가 될 것이다. 이렇게 언어로 풀어서 쓰려고 하면 오히려 어렵지만, 위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매일의 일상에서 직관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때문에 많은 예를 들수록 직관의 의미에 접근하기 쉬워진다.


직관도 '지능'이다

직관도 지능이다. 다만 이성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지능인 것으로 보인다. 이성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추리하고 사고하는 과정이다. 달무리가 졌으니 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논리에 입각한 '인과율'을 차근차근 계산하는 것이다. 반면 직관은 조금 더 순간적인 '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성과 직관 중 무엇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지, 아니면 어느 쪽이 더 높은 지능인지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

  

 

<킴 픽Kim Peek과 스티븐 윌셔Stephen Wiltshire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서번트 증후군 환자이다>


직관과 이성의 비교 - 서번트 증후군

이성을 인과율을 논리적으로 판단하는 과정이라고 가정해 보면 이를 매우 빨리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간혹 매스컴에서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폐 환자에 관해 다루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서번트 증후군 환자들이다. 한 예로, 영화 <레인맨Rain Man, 1988>의 실제 인물로 잘 알려진 킴 픽Kim Peek이라는 자폐 환자는 일반인은 며칠이나 걸릴 수학 계산을 몇 초도 안 걸려서 계산한다거나, 수천 권의 책을 한번 읽기만 하면 글자 하나하나 전부 기억해 낼 수 있다거나 하는 등의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능력들은 소수의 특별한 인간들만이 가질 수 있는 초월적인 능력일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는 의외로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능력은 컴퓨터에게 시킨다면 매우 간단한 명령만으로도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계산을 빨리 하는 것과 지능이 높은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만약 아인슈타인과 킴 픽에게 곱셈 대결을 시킨다면 누가 이기게 될까? 킴 픽은 단순 계산에는 매우 탁월함을 보였지만 아인슈타인은 의외로 수학에 약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킴 픽이 계산은 훨씬 빨리 해내겠지만 그렇다고 킴 픽이 아인슈타인보다 더 지능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다른 예로 스티븐 윌셔Stephen Wiltshire라는 자폐증 환자가 있다. 스티븐 윌셔는 눈으로 본 풍경을 순식간에 암기하여 똑같이 사진처럼 그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헬리콥터에서 뉴욕 같은 대도시를 잠깐 보고 나면 나중에 도시의 풍광을 거의 틀림없이 똑같이 그려 낸다고 한다. 이는 확실히 보통 사람들은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이기 때문에 언론매체에서는 그를 '그림의 천재'라고 부르며 주목해 왔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관점에 따라서는 그다지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도 있다. 스티븐 윌셔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단순히 자신이 봤던 풍경을 정확하게 기억해내는 능력은 디지털카메라에게도 얼마든지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그린 그림들에도 아름다움이 있으므로 그의 미술에 예술적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스티븐 윌셔가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올랐다고는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화가들은 단순히 본 그대로 잘 그리는 능력으로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것이 아니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모두 자신만의 특별한 미술들을 새롭게 창조해 낸 사람들이었다. 역시 비슷한 사고 실험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스티븐 윌셔 중 누가 더 풍경화를 빨리 정확히 그릴 수 있는가 하는 시합을 벌인다면 아마도 스티븐 윌셔가 이기겠지만 이 역시 스티븐 윌셔가 다 빈치보다 더 위대한 예술가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평범하지 않지만 단순한 능력들, 평범하지만 복잡한 능력들

서번트 증후군 환자의 특별한 능력은 보통 사람들은 가지지 못한 능력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기해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런 능력들은 매우 단순한 능력들이다. 이것은 묘한 공통점인데, 서번트 증후군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은 대부분 컴퓨터로 구현하기 매우 쉽다는 것이다. 이 능력들을 분류해보면 계산하기, 기억하기, 복제하기 등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는 모두 우리가 컴퓨터를 다룰 때 사용하는 가장 기초적이고 단순한 명령어들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컴퓨터로 구현하기 어려운 능력들은 무엇이 있을까. 현대에는 컴퓨터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의 개발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모방하려고 하면 할수록 인간의 사소한 행동들 조차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지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아주 간단한 예로 우리가 아주 쉽게 행하는 '걷기'도 분석해 보면 수십 개의 근육과 골격, 신경, 그리고 균형감각과 이를 동시에 통제하는 뇌까지 있어야 하는 복잡한 지능을 필요로 한다. 진짜 인간처럼 두 다리로 걷는 로봇을 지난 수십 년 동안 만들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겨우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이 복잡성 때문이다. 그리고 뛰는 로봇은 아직까지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델포이 신탁, 신내림을 받는 그리스의 무녀>

델포이의 신탁

그렇다면 단순한 걷기보다 더 복잡한 인간의 행동은 뭐가 있을까.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보자. 컴퓨터 인공지능으로 '델포이의 신탁'을 구현할 수 있을까? 근대에 이성 중심주의가 시대를 지배한 이후 사람들은 신내림이나 신앙, 광기 같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여러 비이성적인 행동들은 미성숙하거나 수준 낮은 야만적 행위로 여겨왔다. 하지만 여기서 약간의 호기심을 발휘해서 이런 영적인 행동들, 그러니까 근현대에서 배척당했던 인간의 비이성적인 행동들을 인공지능으로 구현한다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 만약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프로그래머들에게 '신 내림'을 구현해 달라고 한다면 프로그래머들은 해 낼 수 있을까? 

인간의 영적인 행동을 컴퓨터로 구현하려고 하면 프로그래머들은 갑자기 거대한 벽에 부딪히게 된다. 다리나 팔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구현해 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지성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꼭 신내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랑이나 분노 같은 인간의 평범한 감정 역시 컴퓨터로 구현하는 것은 현재로써는 불가능하다. 수만 자릿수의 복잡한 수학계산을 단 몇 초 만에 해내는 컴퓨터 프로그램은 쉽게 만들 수 있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프로그램을 구현하려고 하면 현재까지 인류가 축적시킨 지성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직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직관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알파고가 바둑에서의 직관을 구현해 냈다고 해도, 이는 바둑에 사용되는 단 하나의 직관을 구현했을 뿐이고 심지어 알파고를 프로그래밍 한 프로그래머들도 알파고가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의 직관을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사람들이 사용하는 수많은 다른 직관들은 그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의 두뇌에서 무엇이 어떻게 작동하여 나타나는지 우린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직관과 이성, 높은 지능이란 무엇일까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무엇이 진짜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인지 고민하게 된다. 우리는 보통 복잡한 수학계산을 빨리 잘 해내는 친구를 보면 똑똑하다고 말하지만, 일상에서 감정적이어서 눈물을 자주 흘리는 사람을 두고는 똑똑하다고 말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깊이 고민해 보면 실제로 어느 쪽이 진짜 더 높은 지능의 발현인지는 쉽게 말하기 어렵다. 어쩌면 우리가 근대적 관점에서 높게 평가했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능력보다 오히려 감정이나 직관, 창조성, 영성 같은 비이성적인 능력들이 더 근본적이고, 깊은 인간 지성의 발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 고흐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1888>

예술에서의 직관

인간의 지성은 이렇게 미묘하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은 어떤 종류의 지능으로 봐야 할까. 우리는 예술가들을 '창조적Creative'이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예술가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새로운 이미지들을 스스로 창조해내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적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술가들이 창조 행위를 할 때는 직관을 사용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성을 사용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상상력을 발휘해 볼 수밖에 없겠지만, 예술가들의 창조행위는 대부분의 경우 직관적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어린 시절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을 때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우리는 논리나 이성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냥 순간순간의 감,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고른 색의 크레파스를 화면에 그을 때 느껴지는 어떤 '기분 좋은 느낌'에 의지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직관이다.

예술가들도 마찬가지다. 예술가들은 최초에 그림을 구성하는 단계에서부터 그림을 완성하는 지점까지 대부분의 경우에 직관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려고 마음을 먹는 것을 우리는 '영감'을 떠올렸다고 표현하는데, 이때 고흐가 머릿속으로 앞으로 그려질 그림을 상상해 내는 것은 직관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다. 앞으로 그려질 이미지를 순간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이성적으로 나무가 몇 그루, 별은 몇 개 이런 식으로 어떤 구체적인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어떤 느낌의 이미지를 만들겠다'라고 생각하는 영감만 존재한다.

그리고 고흐가 붓질을 차례차례 이어 나가는 거의 모든 과정 역시 직관에 의지한다고 볼 수 있다. 고흐가 순간적으로 붓 터치가 될 곳의 주변 색과 형태의 조화를 파악하여 고흐가 가진 감각으로 봤을 때 가장 최선의 어떤 '직관적 결정들'을 내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왜 이런 색과 붓 터치를 '결정'했는지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냥 감각적으로 아름답다고 판단할 뿐이다.

     

고흐의 그림도 지성의 결과물이다

만약 이런 결정을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에게 시킨다면 어떨까. 예컨대 인공지능에게 '가장 아름다운 붓 터치를 결정하라'라고 명령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에게 어떤 색을 조합해 내라고 하거나 똑같은 이미지를 복제하라는 명령은 내릴 수 있지만 아름다움을 판단하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미적 결정을 내릴만한 지능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에도 진정한 의미에서 미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미적 판단은 아직까지는 인간만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감성적인 고흐의 미술도 분명히 '지성'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고흐는 책상에 앉아 글을 읽거나 사람들과 토론하며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허름한 방구석에 틀어박혀 고뇌하며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고흐의 그림에 '지성'이 결여되어있다고 볼 수는 없다. 직관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보면, 고흐의 그림은 오히려 이성의 영역을 초월한 직관이 발현된, 더 높은 수준의 '지성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피카소의 이성과 고흐의 직관

고흐와 피카소의 예술에 우열을 가릴 수야 없겠지만 많은 비평가들이 세잔과 피카소를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예술가로 평가하는 와중에, 대중들은 고흐의 강렬한 삶과 예술에 관심을 가진다. 피카소가 유명한 것은 유년기 시절부터 드러난 그의 천재성과 입체주의Cubism라는 파격적인 미술 형식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순수하게 그의 그림 자체를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사람들이 고흐의 그림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그 자체로 그림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수준 높은 지성의 발현일 수도 있다. 이것은 어쩌면 예술이 가진 가장 중요한 가치인데, 사람들이 논리나 이성으로 철학이나 과학을 탐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유를 즐길 수 있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직관의 관계

미술에서의 직관에 대해 되도록 자세히 설명하려고 한 이유는 이것이 미술의 창조나 감상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에서 직관의 역할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또 저평가된 측면이 있다. 

현대미술을 감상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이해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술의 감상은 이성보다는 주로 직관에 의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미술관에 들어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감상한다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이 그림이 그려진 시대나 사조, 혹은 그림의 배경 설명 등을 궁금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배경 지식을 이해하고 공부하는 것보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눈으로 보고 그 이미지에 어떤 느껴지는 바가 있다면, 이것이 훨씬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예술을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있는 그대로 보고 직관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적인 즐거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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