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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Aug 26. 2020

8. 피카소와 이데올로기

모더니즘 페인팅과 이데올로기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 1937

피카소의 대표작

피카소의 대표작을 꼽으라고 하면 아마 '아비뇽의 여인들'과 '게르니카'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두 그림이 유명한 이유는 서로 다른데, '아비뇽의 여인들'은 피카소의 입체주의Cubism를 대표하는 그림이기 때문에 유명하다면, '게르니카'는 이 그림의 스토리, 그러니까 피카소가 게르니카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민간지역 폭격 사건을 고발한 정치적인 그림이기 때문에 유명하다. 

피카소는 나이가 들면서 종종 정치적인 그림을 그리곤 했다. 게르니카가 그려진 시기는 1937년이니까 피카소도 이제 56세의 중년이 되어있을 시기다. 50대의 아저씨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피카소는 워낙 여자나 밝히는 풍운아 같은 이미지였기 때문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정치적 그림을 그리는 건 특별해 보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게르니카의 사이즈는 7m x 4m 정도로 매우 크게 그린 것인데, 그림이 이렇게 큰 경우는 그 자체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고전회화에서 왕이 자신의 즉위식 그림을 주문할 때 크게 그리도록 주문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그림의 크기는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시키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카소는 어떤 생각으로 게르니카를 그린 것일까. 왜 피카소는 이 특정 사건을 이렇게 크게 그리면서 까지 고발하려고 했던 것일까. 


혼돈의 유럽

모더니즘 페인팅이 꽃피던 시기의 유럽은 말 그대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뻔한 수사 같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늘 여자에게 둘러싸여 있던 피카소였지만 사실은 혼란스러운 유럽에도 둘러 싸여 있었던 것이다. 당시 유럽은 곳곳에서 혁명과 전복이 일어나던 시대였다. 왕과 귀족의 전통 세력은 차츰 무너져 내려갔지만 혁명을 주도했던 시민 세력은 다시 노동자들과 부르주아로 갈라졌고 이들의 갈등은 차츰 수면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원래 힘이 비등할 때에는 오히려 갈등이 더 극심한 심한 법이다. 단순히 시민 중심의 새로운 시대가 안착하는 과정에서 생긴 '성장통'이라고 하기에는 갈등의 양상이 너무 심화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에, 피카소도 근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써 어떤 시대관이나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피카소는 예술가로서 혹은 한 개인으로서 어떤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을까. 


피카소의 정치관을 이해하려면 우선 그의 조국이었던 스페인의 정치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스페인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조금 늦게 혁명을 겪었는데, 영국의 명예혁명은 1688년, 프랑스 시민혁명은 1789년인데 비해, 스페인은 1874년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왕정을 벗어나게 된다. 영국보다 거의 200년이나 늦은 것이다. 스페인이 늦게 혁명을 겪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만큼 기득권 전통 권력의 저항도 거세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스페인에서도 결국 민주정부는 수립되었지만, 스페인의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거세었던 만큼 시민혁명과 이에 따르는 민주정부로의 권력이양은 순탄치 않았다. 스페인은 1874년에 의회 민주주의를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수십 년간 국정은 계속 불안한 상태가 지속된다. 그리고 이 갈등 상황은 결국 1936년의 '스페인 내전Spanish Civil War'이라는 형태로 폭발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의 두 세력, 공화파 시민세력 vs 왕당파 프랑코

스페인 내전은 쉽게 말하면 시민세력과 왕과 귀족을 중심으로 한 전통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이다. 이는 좌파와 우파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민세력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대표되는 좌파정권을 세우길 원했고, 전통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줄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길 원했다는 점에서 보수 우파였다. 

그런데 스페인 내전은 당시 혁명의 분위기에 역행하는 전쟁이었다. 시민들이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여 일으킨 전쟁이 아니라, 반대로 기득권 세력이 민주정부에 대항하여 일으킨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소위 왕당파로 불리는 전통 권력은 프랑코 장군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리고 이 쿠데타를 기점으로 스페인 내전은 1936년에 시작되어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까지 약 4년간 지속된다. 



1937년 게르니카 폭격 직후의 사진

게르니카 민간인 폭격 사건

이 스페인 내전 중에 일어났던 사건 중 하나가 바로 피카소가 그렸던 게르니카 폭격 사건이다. 이 사건은 간단히 말하면 왕당파 프랑코 장군이 게르니카라는 마을을 폭격한 사건이다. 프랑코는 적군의 퇴각로를 차단하기 위한 군사작전이었다고 주장하는 모양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민간인이 사망했기 때문에 스페인 내전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중 하나였다. 실제로 이 사건이 주목을 받은 이유도 수백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수년간 지속되며 수십만 명의 사상사를 낸 스페인 내전에서 수 백 명 정도 죽는 사건은 별로 큰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은 군인끼리만 해야 한다는 불문율은 존재한다. 때문에 민간인이 사망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폭격을 당한 민간인들의 입장에서는 큰 비극이었다.


히틀러와 프랑코

한편 게르니카 폭격 사건은 히틀러가 개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폭격을 계획한 것은 프랑코가 맞지만 실제로 폭격을 가한 것은 프랑코가 아니라 히틀러의 '콘도르 사단'이라는 특수 부대였기 때문이다. 프랑코는 이제 막 정권을 잡은 히틀러에게 게르니카 폭격 지원을 부탁하게 된다. 당시 히틀러는 이미 2차 세계대전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게르니카 폭격은 '폭격기'라는 새로운 무기를 시험해 볼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전투기에 의한 대규모 폭격은 지금에야 평범한 전략이지만 당시만 해도 새로운 전술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자신의 새로운 공격 무기를 게르니카를 대상으로 시험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히틀러와 스탈린. 히틀러는 프랑코를, 스탈린은 스페인내 공산주의 정부를 지원했다.


스페인 내전은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프랑코는 왜 히틀러에게 폭격을 부탁했고 히틀러는 왜 이를 수용했을까. 이는 당시 유럽의 정치상황을 이해해야 하는데 쉽게 말해 둘은 서로 우군의 관계에 있었다. 프랑코와 히틀러는 같은 전체주의 사상을 공유하고 있었고, 또 공산주의에 대항했다는 점에서도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스페인은 독일과 바로 맞붙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는 나라에 자신이 싫어하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다는 것은 영 불편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페인의 공산주의 정부군은 혼자였을까. 프랑코가 히틀러의 지원을 받는 동안 스페인 정부는 소련의 스탈린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까 스페인 내전은 단순 내전이 아닌 유럽 전체를 관통하는 이데올로기 싸움의 양상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 내전을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으로 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의 가장 핵심 인물을 두 명 꼽자면 독일의 히틀러와 소련의 스탈린이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히틀러였고 히틀러를 무너뜨린 것은 스탈린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유럽의 두 괴물은 뒤에서 스페인 내전을 지원하고 있었다. 사상적으로 보면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린 이유

당시 피카소는 공산주의 진영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피카소는 프랑스에 있을 때도 실제로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고 조금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스탈린으로부터 '스탈린 평화상'이라는 상도 받기도 했다. 말하자면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린 것도 결국 우파였던 프랑코를 비난하고 스페인 좌파 정부를 응원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프랑코 장군의 도덕적 잘못을 전면으로 내세워 그의 정치적 정당성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게르니카 폭격은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는 점에서 프랑코의 정치적 입지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실제로 프랑코는 국제 사회로부터 게르니카 폭격에 대한 지속적인 비난을 받게 된다. 

하지만 피카소가 바랬던 바와는 다르게 프랑코는 쿠데타에 성공하고 스페인을 무력으로 장악하게 된다. 프랑코는 1939년 정권을 장악한 이후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천수를 누리며 38년간 스페인을 통치했다. 다행히 프랑코 사후에는 다시 민주국가로 돌아왔지만 그간 스페인 사회는 수많은 정치인들이 감옥에 가거나 사형을 당하는 등 독재의 고통을 겪게 된다. 피카소 역시 프랑코를 피해 망명을 떠났고 죽을 때까지 고국인 스페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였던 피카소는 결국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파블로 피카소 1951

피카소의 또 다른 그림

지금 시점에서 보면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패했다고 평가해야겠지만, 피카소는 당시 공산주의가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피카소가 공산주의를 지지했다는 것은 그의 다른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위의 그림은 우리나라의 6.25 전쟁을 다룬 것인데, 제목은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이다. 제목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6.25 전쟁 당시 있었던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주제로 한 그림이다. 피카소는 프랑코를 피해 프랑스에 망명해 있는 동안 프랑스 공산당원으로도 활동했기 때문에 공산당으로부터 이런 그림을 의뢰받고 그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그림의 주제였던 신천 학살의 진위에 대해서는 주장이 갈리는 편이다. 피카소는 그림을 통해 미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만 정황 상 미군이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신천에 사는 주민들이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남한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갈라져 서로 싸우는 와중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보고있다. 미국이 민간인 학살을 저지를 이유가 특별히 없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의 진위를 떠나서 피카소가 예술을 통해 공산주의를 응원하고 싶어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후에도 피카소는 계속 공산주의를 지지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뉴욕이 미술세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이후에도 피카소는 뉴욕을 방문하지 못했는데, 이는 미 FBI가 피카소의 미국 입국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반공에 열을 올리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대표적인 공산주의 예술가였던 피카소가 미국에서 활동하도록 그냥 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대표 화가 잭슨 폴록은 피카소의 그림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공산주의 화가 피카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 자유주의의 선두에 있다고 자부하는 미국이 영 면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모더니즘 페인팅과 이데올로기

피카소가 공산주의를 지지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공산주의는 불평등이 만연한 근대 시대에 평등을 외친 이상주의이기 때문에 예술가의 눈에는 일면 아름답게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면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는 똑같이 독재를 낳았다. 그리고 결국 독재로 인해 고통스러웠던 것은 시민들이다. 다만 애석한 점은 두 정치세력 모두 '시민을 위한 정치'를 표방했다는 점이다. 근대의 양 극단에 위치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이데올로기는 모두 자신의 승리를 위해 시민의 자유를 억압했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이런 종류의 모순은 피카소 본인에게도 나타난다.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피카소는 그 누구보다도 자본주의적으로 살았으니까. 

시민혁명 이후의 모더니즘의 시대는 이데올로기 싸움의 시대이기도 하다. 때문에 피카소를 포함한 많은 예술가들도 각자 정치색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모더니즘 페인팅의 발전과정에는 정치색이 드러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이는 모더니즘 페인팅이 예술을 위한 예술, 즉 가장 순수한 예술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나 전체주의에서는 모두 예술을 혁명과 선동의 도구로만 이용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순수함을 지향하는 미술은 별로 필요가 없었다. 서로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모더니즘의 시대에 시작된 이데올로기 갈등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폭력이 동반되지 않은 이데올로기 싸움이라면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이지만, 갈등의 양상이 너무 심해진다면 문제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인류의 역사는 반복되는 계급 갈등의 역사일 뿐일까. 시대가 지나 수천 년이 더 흘러도 여전히 우리의 후손들은 이데올로기 싸움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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