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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Sep 23. 2023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가는길

포스트모더니즘의 탄생

그렇게 근대는 종말하고 새로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Post-'는 '-의 다음'이라는 뜻이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다음, 즉 근대의 다음 시대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근대가 끝난 이후 실제로 세상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우선 양차대전 이후 세계는 '분열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히틀러는 독일인이 세계를 통치하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꿈꾸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전 세계의 나라들은 오히려 모두 독립하며 각자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죠. 우리나라도 그때 독립하며 탄생했던 나라들 중 하나입니다.

과학에서는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이성의 절대성이 무너지게 됩니다. 결국 인간의 이성으로는 세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 최고의 천재 물리학자였던 리처드 파인만은 


"이 세상에 양자역학이 무엇인지 이해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라고 말하며 양자역학을 그 어떤 인간도 결코 이해할 수 없음을 선언하게 됩니다. 역사상 최고의 천재였던 아인슈타인도 이해못했고, 미국 최고의 천재로 인정 받았던 파인만 본인도 이해할 수 없는데 도대체 어느 누가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인간 지성의 한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죠.



<근대의 세계>

중심과 주변

근대를 이미지화 시켜보면 우뚝솟은 거대한 탑과 그 주변의 낮은 세계와 비슷합니다. 근대는 '이성'과 '합리'로 이루어진 탑이 중앙에 서 있었고 그 주변을 돌고 있는 사람들은 백인 남성들이었습니다. 갑자기 왜 '백인 남성'이 나오나 싶을수도 있지만, 생각해 보면 근대를 이룬 위대한 인물들은 정치인, 과학자, 사상가, 예술가 할 것 없이 전부 백인 남성들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히틀러도, 아인슈타인도, 마르크스도 모두 백인이었으며 반 고흐나 피카소, 잭슨 폴록 같은 예술가들도 하나같이 전부 백인들이었으니까요. 

말하자면 세상은 백인들이 이성과 합리주의로 만들어 놓은 '중심'과 그 외의 '주변부'로 이루어져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을 지키던 거대한 중심 탑이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말 그대로 먼지가 가득한 폐허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다시 무너진 탑을 세워야하지 않을까요? 누가 남아있을까요? 그때부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성과 다인종의 등장입니다. 

현대 사회는 더이상 백인 남성 중심의 사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히틀러의 나라였던 독일만 해도 여성 총리 메르켈이 등장하여 자그마치 16년을 통치했으니까요. 이는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일까요? 우리나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받은 것은 어떨까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기에는 격세지감입니다. 아마 과거라면 동양인이 아카데미에서 최고의 상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을 테니까요.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백인 남성이 아닌 여성과 다인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백인남성의 '중심'에서 여성과 다인종의 '주변'으로 확장을 시작한 것이죠. 위의 이미지로 보면 중심의 큰 빛의 탑이 '백인 남성'이라면 그 주변의 구름들은 '여성과 다인종'에 해당합니다. 주변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좀비의 탄생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접어들어 그렇게 여성과 다인종들이 모여 함께 새로운 탑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대의 폐허 더미와 건물 잔해들속에서, 갑자기 핏기없는 푸른 팔들이 지면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지상으로 기어올라온 그 존재들은 


'어우우...'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이 갑자기 등장한 뜬금없는 존재들은 누구일까요? 가만히 살펴보니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존재들입니다. 바로 좀비였습니다. 세상에 갑자기 좀비들이 깨어나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갑자기 왠 뚱딴지같은 좀비냐구요? 실제로 좀비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을 가장 상징할만한 존재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을 대표하는 미국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는 '결정불가능한 존재'들이 등장한다고 보았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릴까요? 우선 좀비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좀비는 살아있는 존재일까요 죽어있는 존재일까요? 좀비는 살아있는것도, 그렇다고 죽어있는 것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경계'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의 존재'


근대 사람들은 인간에게는 '삶'과 '죽음'만 두가지 있다고 보았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가 삶과 죽음의 그 중간 어디쯤에 걸쳐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너무도 확실한 이치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는 이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존재들, 즉 '결정불가능한 존재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상하게 엮는거 아니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분명 중세 문학까지만 해도 좀비는 등장한 적이 없었습니다. 좀비는 분명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처음 등장한 새로운 존재들입니다.

아직 납득이 되지 않으신다면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동성애자들은 어떨까요? 게이는 남자라고 해야할까요 아니면 여자라고 해야할까요? 게이들은 남성의 몸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행동을 보면 매우 여성적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게이 또한 남성과 여성, 그 둘 사이의 경계의 어딘가 쯤에 존재하는 '결정불가능'한 존재들인 셈입니다. 과거에는 이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남자아니면 여자라는 절대적 관념이 존재했으니까요. 아픈 역사지만 히틀러는 동성애자들을 선별해서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렇게 '결정 불가능한 존재들'이 등장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요? 이는 아마도 근대의 중앙의 탑, '이성과 합리주의'라는 탑이 무너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근대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있을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세상에 그런 진리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절대적인 국가, 절대적인 과학이론, 절대적인 사상, 절대적 미술을 꿈꾸었지만 모두 허무한 '꿈'이었을 뿐입니다. 세상에는 명확한 그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다는것이죠.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들어서면 모든것의 경계가 흐릿해집니다. 심지어 가장 명확해 보이는 '삶과 죽음'조차 그 경계가 모호해 지기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결정 불가능한 존재, '좀비'가 탄생한 것입니다. 


중심화 vs 주변화

백인남성중심 vs 여성, 다인종

이성 vs 감성

정답 vs 결정 불가능


좀비가 탄생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둘 다 '모던'이니까 근본은 같지만, 이렇게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를 대략적인 표로 만든다면 위와 같습니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절대성에서 상대성으로, 이성에서 감성으로, 백인 남성에서 여성, 다인종으로, 정답에서 결정 불가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올라퍼 엘리아손의 설치미술>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특징

이렇게 변화된 세계관은 당연히 미술에도 영향을 줍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즉 현대미술은 근대의 미술과 어떤 다른 변화가 나타났을까요?

아닌게 아니라 실제로 미술이 '좀비화'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미술들이 경계화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죠. 근대 미술은 '조각과 회화'라는 전통 미술의 탑이 굳건하게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미술에서는 위의 작품처럼 설치미술이나 퍼포먼스같은 새로운 형태의 미술들이 등장합니다. 위의 설치미술은 올라퍼 엘리아손이라는 예술가가 태양빛이 부족한 영국사람들을 위해 인조 태양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이 설치미술은 그래도 태양같이 둥근 형태를 만들기는 했으니 '조각'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렇게 말할수도 있겠지만 이 미술은 우리가 기억하는 전통조각, 예컨데 '그리스의 비너스'와 같은 고전조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냥 조각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태양을 벽에 '설치'했다고 표현하는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설치 미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전히 저렇게 설치된 무언가가 왜 '미술'로 분류 되는지 어색하게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미술은 그림 아니면 조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현대의 미술은 좀비화 되어있습니다. 좀비가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는 애매한 존재인 것처럼, 미술도 다른 형식들과의 경계선을 타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위의 설치 미술은 무엇과 무엇의 경계라고 해야 할까요? 아마 '미술과 대자연' 그 경계 어디쯤에 있는 미술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현대 미술은 이렇게 세상 모든 다른 장르와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며 발전하게 됩니다. 


<데미안 허스트, '살아있는 자들의 마음에 존재하는 물리적 불가능성', 1991>

겉모습 뿐 아니라 다루는 주제도 '좀비화' 현상이 나타납니다. 겉모습이 컵이라면 주제는 그 안에 들어있는 음료수같은 것입니다. 내용물도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위의 설치미술은 데미안 허스트라는 예술가의 설치미술입니다. 일단 작품 자체도 조각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박제라고 해야할지 애매합니다. 그래서 '조각과 박제된 동물' 그 경계 어디쯤에 있다고 해야 할 듯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주제도 과거와 달리 '경계화'되어 있습니다. 

이 예술가의 주제는 '죽음' 입니다. 과거 근대의 미술의 주제를 생각해 보면 '아름다움'이었습니다. '회화와 조각'을 어떻게하면 더 아름답게 발전시킬까, 어떻게 더 완성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던 것이죠. 하지만 현대미술에서는 중심이 아닌 외부 세계와의 경계선을 타기 시작합니다. 이 경우도 '미술과 죽음'사이의 경계 어디쯤에 주제가 있는 것이죠. 

이 외에도, 각 예술가들은 모든 사회의 주제와 미술을 결합시켜서 '좀비화'시키게됩니다. 어떤 예술가가 과학에 관심이 많으면 과학과 미술을 결합시키고, 사랑에 관심이 많다면 사랑과 미술을 결합시키고,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다면 사회문제와 미술을 결합하는 식입니다. 무한대로 확장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죠. 현대미술이 다루는 주제가 많은 이유가 이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주제가 예술과 결합하여 '경계화'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죠.


현대미술의 다양성

그렇게 현대미술,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우리는 미술 하면 보통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같은 그림들, 아니면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같은 조각들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할 14명의 예술가들과 그들이 창조한 미술들이 조각과 그림이 아니라는 것에 놀라지 않기를 바랍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이렇게 '경계의 미술' 즉 '좀비화 된 미술'입니다. 

사실 이렇게 미술이 조각과 회화를 탈피한 것은 역사상 처음 일어난 일이니 적응이 쉽지 않은것은 당연합니다. 여전히 왜 저런게 미술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분명 예술가들이 새롭게 창조한 미술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것을 금방 알아본다고. 우리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것을 보길 좋아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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