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없는, 확고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은 '트렌드가 없는 것이 트렌드'인 시대이다. 예전에 비하면 요즘 사람들의 취향은 확실히 다채로워졌다는 느낌이 든다. 일단 길거리에 나가면 이전보다 다양한 패션 스타일이 흐르고 있다. 마음에 드는 콘텐츠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이들에 대한 시선도 많이 바뀌었다. '덕후'라는 단어가 어디서나 자유롭게 쓰이고 있으며, 어느 분야든 소비의 주체로 환영받고 있는 중이다. 팔로워가 백만 명이 넘는 인플루언서를 봐도 '누구...?'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청률을 보면 더 명확해진다. 예전이라면 유명 인기 드라마라고 하면 무조건 40-50%를 넘기는 것이 보통이었다.(그 유명한 SBS 드라마 '모래시계'의 평균 시청률은 46%, 최고 시청률은 64.5%였다.) 하지만 지금은요? 10%가 넘으면 우와! 경사다. 예능의 경우 4%만 넘어도 대박을 쳤다고 인정받는다.
최근 큰 화제가 되었던 '선재 업고 튀어'나 '정년이'의 시청률을 보면 각각 5.8%, 16.5%였다. 모래시계 때와 달리 지금은 케이블, 인터넷, OTT, 소셜 미디어 등 콘텐츠가 선보이는 채널이 너무 많다. 그러니 시청률이 낮은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비단 TV 프로그램뿐 아니라, 모든 분야가 이렇게 과다할 정도로 새로운 콘텐츠들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다양한 아이템과 콘텐츠가 넘실거리는 시대이기에 자신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다. 드넓은 바닷가에서 마음에 드는 모래알을 찾아야 하는 상황인데, 시간이 부족하다. 시간만 부족하면 다행이게? 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는 수많은 콘텐츠를 씹고 뜯고 즐길만한 돈도 그리 많지 않다. 누구나 인정하는 개성 넘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현실의 벽이 높기만 하다.
취향을 만들어 나갈 여지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소셜 미디어가 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에서는 인기 있는 여행지, 화제가 되는 신상 맛집과 먹거리들, 그대로 손민수하고 싶은 패션 스타일, 요즘 꼭 봐야 하는 책과 영화에 대한 정보를 친절하게 알려주는 이들이 있다. 다행이다. 시간과 돈이 부족한 상황에서 실패를 겪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인플루언서들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지휘하는 사람이 없어 보이는데, 지휘를 당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아졌다. 이렇게 트렌드 아닌 트렌드가 생겨난다.
이런 상황에 이르면서 사람들의 취향이 더더욱 하나로 깔끔하게 묶이는 느낌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인기를 얻은 맛집은 줄이 길게 늘어서고, 매체를 통해서 공개된 연예인과 인플루언서들의 물건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매진 사례를 빚는다. 예전에도 그래왔지만, 이제는 그 경향이 더욱 심화된 듯하다. 좋아하는 인물이나 콘텐츠의 성향을 따라 소비하는 경향을 가리켜 '디토 소비'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니 말이다.
여행 유튜버 빠니보틀이 한 이야기가 있다. 결혼에 대해 사람들이 당연시 생각하는 조건이 있고, 거기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고. 이어서 요즘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를 모른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물어보는 질문 대다수가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는 것인데,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란다. 추천받는 상대방의 취향을 알아야 추천이든 뭐든 할 텐데, 요즘 사람들은 무조건 빠니보틀이 알아서 권해주는 여행지를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기저에 그거인 거야
자기가 왜 이거를 그렇게 해야 되는지에 대한 의도나 철학이 없고 남들이 다 이렇게 하니까 하는 거 그게 의문을 잘 안 가지려고 그래
저한테 진짜 많이 오는 연락이 여행지 추천 좀 해주세요 어디가 좋아요 이러는데 그 질문이 너무 좀 슬퍼요 자기가 어디를 가고 싶은지도 모르는데 해외여행 가고 싶은 거야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해외여행도 그냥 내가 봤을 때 남들이 다 가니까 갈 수 있으니까 그냥 가는 건데 ...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됐지? 본인 취향도 모르고
한국에서 왜 혈액형, MBTI가 인기가 많냐면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스스로 잘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누가 딱 정해줘야 해
빠니보틀의 이야기를 듣고 문득 해외여행을 시작했던 시기를 떠올렸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시기에 배낭을 메고 유럽을 일주하는 여행이 꽤나 유행했었다. 백 팩에 잔뜩 짐을 싸들고, 두꺼운 책을 들고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 같이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는 시기였기에 실수와 실패는 매우 잦았다. 하루종일 숙소를 찾지 못해 노숙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때도 있었고 익숙지 않은 유럽 음식에 자연스럽게 다이어터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행이 즐거웠던 이유는, 그 속에서 나만의 취향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술관에서 내가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을, 식당을 입장하려면 우선 홀에 있는 웨이터와 눈길을 마주쳐야 한다는 것을, 노천카페에서 아페롤 스프리츠를 마시는 여유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배우게 되었다. 여행의 순간들 중에서 쥐구멍에 숨고 싶은 일도 많았지만, 모든 것이 자양분이 되어 나를 만들었다.
지금의 여행은 그때와 퍽 다르다. 여행 전에 인터넷을 뒤져 철두철미하게 계획을 세우고 여행지에서는 스마트폰이 주는 편의를 활용한다.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여행하기 편해졌지만, 다른 사람들의 취향을 고스란히 따라 하는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 취향이 100% 반영된 여행이라고는 볼 수 없고, 대학생 시절 여행이 주었던 감동과 지혜를 기대하기는 더더욱 어려워졌다.
분명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인데, 왜 사람들은 더 획일화되었을까?
결혼을 하려면 몇 억 짜리 집이 마련되어야 하고, 데이트를 하려면 오마카세나 호캉스를 즐겨야 한다. 남들이 하는 것은 무조건 따라 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똑같은 것을 보고 즐기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는 상황이다 보니, 어느 분야든 '초짜'라는 것이 티가 나면 비웃음을 받는다. 이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그저 대다수가 하는 일을 따르는 것이다. 되도록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많이 배워서, 뭐든지 알고 있고 익숙해진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우연히 본 상품 중에서 놀라운 것이 있었다. 새로 산 여행 가방이 깨끗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이들을 위해 항공사의 수화물 스티커를 판매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누구나 가는, 아니, 안 가면 이상하게 보는 여행을 나도 즐기고 있다고,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선언'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여행 초짜처럼 보이기 싫어서 일부러 필요하지 않는 스티커를 잔뜩 붙이다니. 웃프다고 해야 할까. 단순히 디자인이 예뻐서 붙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수화물 스티커를요?
트렌드가 없는 것이 트렌드인 시대인데 이상하게도 여전히 사람들의 내면은 변하지 않은 느낌이다. 우리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신경 쓰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생각 없이 따라 하며 안도한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실패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실패가 있어야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선호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 라는 너그러운 분위기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실패라는 것을 하면 안 되는 사회가 되었다. 날 선 세상 속에서 다치지 않으려면 잘 짜인 계획대로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을 살면서 놓친 취향이야 남들 따라 하면 되고, 그렇게 잘 묻어가면 중간은 될 수 있다.
지금껏 살아 오면서 나다운 취향을 형성할 수 있었던 시기는 유럽 일주를 했던 대학생 때였다고 생각한다. 그때보다 나이는 더 먹었지만, 지금의 나는 대학생인 나였을 때보다 더 줏대가 없다. 선택의 시기가 찾아오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한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열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염탐한다. 그리고 남들이 가는 방향대로 따른다. 그야말로 속 빈 강정이 되어 가고 있다.
스스로를 반성하며,
앞으로 내가 지녀야 할 목표를 세운다.
나는 확고한 줏대가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바로 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