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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러 Mar 17. 2019

패닉 2집 [밑] 리뷰

다시는 볼 수 없는 모습의 희소가치


패닉 2집 [밑]

1996



 '달팽이', '기다리다', '거위의 꿈', '정류장', 'Rain', '다행이다', '같이 걸을까', '말하는 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이적의 일반적인 대표곡들, 그리고 이적에 대한 느낌이다. 대중이 이적이라는 음악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곡 잘 쓰는 발라드 가수, 호소력 짙은 발라드 가수, 그리고 서울대 출신의 엘리트 가수 정도이다. 그 누구도 이적이 천재성을 가진 음악가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이적을 떠올릴 때 피아노 앞에 앉아 감성적인 발라드를 불러 사람들을 치유하는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 이적의 행보를 살펴보면, 그다지 틀린 생각은 아니다. 다만, 이적의 앞에 붙은 `천재성`이라는 수식어에 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가, 왜 이적이 천재라고 불리게 되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발라드 가수로서의 행보만으로 천재라는 칭호가 붙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이적이 패닉 1집 [Panic]으로 처음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낸 1995년으로 돌아가 보자. 펑키한 `아무도`를 타이틀곡으로 내고 야심 차게 활동했지만, 대중은 `아무도`가 아닌 감성적이고 희망찬 `달팽이`에 주목하였다. 덕분에 사회 비판적이고 신나는 후속곡 `왼손잡이`도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달팽이`의 인기가 너무 강렬했던 나머지, 패닉은 곧 `달팽이`였다. 평단이 `아무도`와 `왼손잡이`로 보여준 펑키한 매력과 사회 비판적인 면모를 칭찬해주긴 했지만, 대중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역시 서울대 출신 엘리트라 다르네!` 정도로만 생각하고, 여전히 이적을 감성 발라더로 인지했다. 아, 김진표는 이 당시 그저 `이적 옆에서 색소폰 부는 사내`였다.


 1996년 9월, 패닉은 이러한 고정관념에 제대로 엿을 먹였다.


 패닉 2집 [밑]. 제목부터 왠지 떨떠름한데, 앨범아트는 굉장히 그로테스크하다. 어딘가 뒤틀리고 기괴한 모양새부터 [밑]이 음악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인트로인 `냄새`부터 당황스럽다. 곡 내내 계속되는 숨소리 비트, `이게 무슨 냄새야?`와 입맛 다시는 소리, 괴성, 그리고 김진표의 뭔가 썩고 있다는 나레이션. 첫 트랙부터 대놓고 불쾌감을 선사하면서 패닉의 반전은 이제 시작임을 보여준다.


 [밑]은 [Panic]에서 적절하게 보여주었던 사회비판이 극대화되어,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 대상을 물어뜯는다. 대놓고 살찐 돼지들과 거짓 놀음 밑에 단지 무릎 꿇어야 했다고 말하며 자본주의의 논리를 비판하는 `UFO`, `비린내 나는 상한 혀`라는 비유로 자극적이고 왜곡된 언론의 모습을 그려내는 `혀`, 조세희 작가의 대표적인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연상케 하는 인상적인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는 `그 세 어릿광대의 아들들에 대하여`. `달팽이`를 기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그야말로 산산조각 내버린 파격적인 곡들의 집합이다. 그나마 `강`이 잔잔하고 서정적이지만, `달팽이`와 같은 희망찬 모습을 보여주진 않는다.


 색소폰 부는 사내일 뿐이었던 김진표의 활약도 인상적인데, 폭력적이고 위선적인 교사에게 대놓고 엿이나 먹으라는 `벌레`나, 자식에게 자신의 욕망을 지나치게 불어넣는 부모에 대해 직설적으로 반기를 드는 `Ma Ma`는 [밑]을 사회비판을 넘어 사회적 논란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결국, 이 두 곡은 나중에 가사 전체가 삭제당하는 업적을 달성한다. 이는 랩을 통한 표현의 자유로움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의 장을 열게 되었다.


 [밑]은 작사뿐만이 아닌, 사운드 면에서도 커다란 진보를 보여준다. 남궁연, 김세황과 같은 검증된 아티스트들의 협력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 [Panic]에 비해 사운드가 훨씬 다채롭고 풍성하고, 파격적이지만 그러면서도 어렵지 않은 멜로디를 보인다는 점에서 이적의 탁월한 작곡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혀`는 과감하게 4/5 박자를 쓴다는 점이 인상적이고, `그 세 어릿광대의 아들들에 대하여`는 스토리텔링에 어울리는 재즈풍의 악기 구성과 리듬의 변주에서 파격을 느낄 수 있다.


 전체 트랙 중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곡은 `불면증`이다. 삐삐밴드의 이연정이 함께한 이 곡은 러닝타임이 무려 11분 57초인 대곡인데, 감성적인 발라드풍의 멜로디로 시작하지만 이후, 프리코러스 부분에서 점점 노래가 고조되더니, 싸비에서는 이연정의 파격적인 보컬. 5분대에 접어들면 The Beatles의 `Hey Jude` 마냥 `나나나나`만 열창하지만, 이연정이 괴상한 보컬과 이적의 로우톤이 묘하게 어우러진다. 반복적이지만 굉장히 대중적이고, 다양한 구성으로 마치 뮤지컬 트랙을 듣는 것 같은 인상을 주어 지루하지 않다.


 [밑]은 지금의 이적과 김진표에게 느낄 수 없는 힘이 느껴지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 소중하고 가치 있게 다뤄지는 앨범이다. `달팽이`의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이 싫어서 그에 대한 반항심으로 만들어진 명반이지만, 아웃트로인 `사진`에서 느낄 수 있듯, 서정적인 발라드와의 단절을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김진표는 이후에도 계속 파격적이고 반항적인 음악을 하였지만, 지금은 방향성을 잃어버렸고, 이적은 결국 감상적인 발라더로서의 입지를 더욱 넓혔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지금의 모습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밑]을 통해 그들이 보여준 음악성, 그리고 그 파급력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적 또한 이러한 전체적인 반항의 모습은 [밑]만으로 충분할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적의 발라드는 물론 훌륭하지만, 가끔 그의 반항적인 모습을 느끼고 싶다면 [밑]을 꺼내 듣는 것으로 만족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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