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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구사 Dec 14. 2020

깁미 깁미와 우산 로켓펀치 2

2. 형광팬 캠프

“제가 회사 다닐 때 회식 때마다 부르던 노래가 있는데 그거

한 곡 부를게요. 컨츄리 꼬꼬 <Gimme! Gimme!> 부탁드립

니다.”


스물네 살에 입사해 보험 영업을 하면서 이래저래 좋은 일 싫은

일이 많았고, 별의별 꼴을 다 겪었다. 전화기를 들면 매일 욕설에

음담패설을 들었다. 승마장에 쫓아갔다가 말에 차일 뻔도 하고,

상담을 하자고 먼저 부르더니 다른 회사 영업 사원과 날 나란히

앉혀놓고 더 비싼 선물을 주는 쪽과 계약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비 오는 날 양평에서 혼자 걸으며 다시는 친구들에게 보험을 팔

지 않기로 결심한 날도 있었다.


한 달이 그런 날들로 가득 채워지면 마감을 하고 회식을 했다.

회식은 매번 뜨거웠다. 특히 영업팀 회식은 뜨겁기로 유명했다.

온갖 고생을 하며 또 한 달을 버텨낸 스스로에게, 동료들에게 부

어라 마셔라 술을 따라주고 근육통이 올 때까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첫 회식 때는 와이셔츠가 다 찢어질 정도였다. 노래방

을 가면 첫 마이크는 항상 막내에게 주어졌고 첫 마이크를 잡은

막내는 분위기를 띄워야 할 의무가 있었다. 막내인 내가 그때마

다 불렀던 노래가 바로 <Gimme! Gimme!>였다. 어쩌다 고른 선

곡이었지만 그 후로 오랫동안 마이크만 잡으면 무조건 부르던 노

래. 이제 회사를 나왔으니 다시는 부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노래였다.


나는 이십 대의 대부분을 한 평짜리 고시원에 살며 악착같이 버

텼지만 회사는 버티지 못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맨날 회사 욕을

했지만 회사에도 좋은 사람들은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 매달 받

은 월급을 맥주와 치킨, 비밀스러운 고백과 눈물, 수다로 바꾸며

이십 대를 버텼다. 내 이십 대의 많은 시간은 어쩔 수 없이 회사와

얽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가 사라지자 나의 이십 대도 통

째로 사라진 것 같았다. 간절히 붙고 싶은 면접에서 급히 준비한

개인기가 다 떨어지고 이제 정말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고 생각

한 지금. 우습게도 회식 때 부르던 노래 한 곡이 남았다.


익숙한 전주가 나오자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그리고 나의 이십

대가 주마등처럼 눈 앞을 스쳐갔다. 힘들 때마다 보던 <무한도전>

도, 회식 때마다 부르던 노래도 지금 모두 여기에 있다. 마이크 대

신 가방에서 접이식 우산을 뽑아 들었다. 지난 며칠간 평생 할 긴

장을 다 해서인지, 아니면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인지 신기

하게도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이십 대 내내 불렀던 노래가 들리

기 시작하자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그 시절의 내가 함께 서 있

는 것 같았다. 전부 다 허무하게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갖

은 고생을 하고 사라졌던 나의 이십 대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도와주러 왔다.


아마 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이 노래를 다시 부를 일은 없겠

지. 잘 안 풀리면 내 인생에 회식은 영영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

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을

때 달려 나와준 나의 이십 대처럼. 오늘 이 순간도 마음 깊숙한 곳

에 평생 남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또다시 내게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느낄 때, 다시 달려 나와서 힘을 줄 것이다. 에라이!

그런 중요한 순간에 쪽팔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잖아! 우산을 꽉

쥐고 무대 중앙에 단단히 버티고 섰다. 언제가 됐든 더 이상 나한

테 쪽팔리기 싫었다. 미안해하기 싫었다. 그건 이미 너무 많이 했

다.


“자아, 오늘도 엔젤 플러스 지점 회식에 참여해주신 여러분께

대단히 감사 말씀드리면서!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한 노래 한

곡 띄워드립니다! 컨츄리 꼬꼬 Gimme! Gimme! 가자앗!!”


입에선 회식 때마다 했던 멘트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노래를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리와 골반을 너

무 흔들어서 그런 것 같다. 나중에 작가들에게 듣기로는 골반이

탈골된 사람 같았다고 했다. 정신을 차리니 한창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고 작가들이고 카메라 감독들이고 다들 웃고 있었다. 너무

열창하느라 반응을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반응이 좋으니 기운이

펄펄 났다. 장내 분위기와 노래가 함께 달아오르며 어느새 클라

이맥스가 코 앞이었다. 좋아! 힘을 더 주려고 마이크 대신 잡은 우

산을 꽉 쥔 순간.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접이식 우산을 꽉 쥐면서 버튼이 눌렸고, 로켓 펀치처럼 날아온

우산이 얼굴을 때린 것이다. 춤추느라 골반과 머리가 정반대 방

향으로 향했던 나는 그대로 자빠졌다. 별이 번쩍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넘어지는 와중에도 작가들, 카메라 감독들이 자

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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