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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구사 Dec 14. 2020

깁미 깁미와 우산 로켓펀치 1

2. 형광팬 캠프

언제가 됐든 더 이상 나한테 쪽팔리기 싫었다.

그건 이미 너무 많이 했다.



명히 편안한 자리라고 했잖아요.


면접장 문을 열자마자 14개의 눈과 3개의 렌즈가 나를 쳐다봤

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오라더니 개인기를 하라니요? 그것도 무

대 한가운데서! 제작진은 <무한도전> 멤버들만 속이는 것이 아니

었단 말인가. 아니 나 같은 예비 ‘형광팬’을 속일 필요는 없을 텐

데. 이 사람들 이제 그냥 속이는 게 버릇이 된 거 아냐? 놀란 와중

에도 무대로 걸어가면서 이곳이 정신 감정 특집이나 탐정 특집

등에서 여러 번 나왔던 무대임을 알아차렸다. 보통 외부에서 누

군가를 초대해 멤버들이 방청석에 앉고, 게스트가 무대에 올라

이야기를 이끌어갔던 곳이다. 오늘은 내가 바로 그 게스트인 것

이다. 무대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자기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잃어버린 형을 찾으러 나온 ‘저쪼 위에’ 박구

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보통 이런 자기소개 후에 가장 좋은 반응은 ‘저쪼 위에 가 뭔가

요?’ 하고 내가 준비한 질문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자기소개가 신

통치 못했다면 반응이 없다. 별 반응 없이 면접관이 준비한 질문

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무반응보다 더 나쁜 경우가 있는데 그것

은 바로


“뭐라고요? 하나도 안 들렸어요.”이다.


떨린 나머지 목소리가 작았나 보다. 발음도 형편없었던 것 같

다. 시장통에서 노점상으로 단련된 내가 목소리가 작다니! 콜센

터에서도 매일 ‘작게 좀 말하라’고 실장에게 혼나는 데. 당황해서

자기소개를 다시 했고 작가들은 심상하게 듣더니 물었다.


“저쪼 위에가 뭐예요?”


아까 인사할 때 설명해야 했는데. 긴장해서 까먹었나 보다. 그

제야 셔츠 위로 튀어나온 돌기를 가리켰다.


“유재석 형님은 (젖꼭지가) 밑에 있어서 ‘저쪼 아래’ 시고 저는

위에 있어서 ‘저쪼 위에’입니다. 에.. 둘이 합치면 위치가 중간이

니까, 그러니까 지원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실수했다. ‘합치면’이 아니라 ‘평균을 내면’이라고 했어야 하는

데. 합치면 젖꼭지가 4개 아닌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

다. 긴장해서 자기소개부터 망했다. 내가 말을 할수록 작가들의

흥미가 빠르게 식는 게 보였다. 점점 굳어가는 작가들의 표정에

내 자신감은 선풍기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처럼 빠르게 녹기 시작

했다.


“아, 예...”


그리고 정적. 그 짧은 시간 동안 뒤통수에서 땀이 뚝뚝 떨어지

고 겨드랑이에는 온천수가 폭발했다. 옆구리를 타고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면접을 망쳤다는 생각에 어지러웠다. 나와 눈을 마주

치는 작가는 한 명도 없었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서류만 보고 있

었다. 또 놓치는 건가. 거의 다 왔는데. 내 힘든 삶의 유일한 낙인

<무한도전> 멤버들을 만날 기회가 코앞인데. 회사는 사라지고 공

부는 안 되고 나이는 먹어서 이제 30대. 갈수록 힘들어만 가는 내

인생에 이 정도 보상도 받을 수 없는 건가. 마음속에서 뭔가가 툭

하고 끊어졌다. 그와 동시에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나 없는 ‘형광팬’ 특집을 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못 볼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차피 망

한 거 지금부턴 그냥 편하게 다 내려놓고 해 보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저기! 작가님들!”


서류만 들여다보던 작가들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지금 준비해온 ‘저쪼 위에’가 실패해서 엄청 주눅 들었

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무거나 편하게 물어봐 주세요. 저

원래 잘 떨지도 않고, 낯도 안 가리는데 긴장했나 봐요.”


긴장을 풀고 속마음을 털어놓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색

했던 공기가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고 왼쪽 끝에 앉은 작가가 입

을 열었다.


“안 그래도 긴장을 엄청 하시던데요. 캠프에 가면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방금은 제가 긴장해서 그렇고요. 저 정말 낯을 안 가려요. 보

험 회사에서 영업직으로 오래 일했고, 밖에서 기다리시는 분

들이랑 금방 친해져서 전화번호도 다 받았어요.”


 “밖에서 기다리는 분들 전부 다요?”


“네. 왠지 탈락해도 연락을 안 주실 것 같아서요. 언제 전화 오

나 기다리다가 갑자기 ‘형광팬’ 특집이 나오면 너무 속상하잖

아요. 면접 통과된 분이 있으면 단톡 방에 이야기해 주기로 했

어요. 그럼 떨어진 사람도 깔끔하게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

가고요.”


대답이 끝나자 작가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나도 말을 할

수록 점점 편해져 이어지는 일반적인 질문들에는 제법 잘 대답했

다. 처음보다 훨씬 분위기가 부드러워질 무렵.


“개인기 준비한 거 있으세요?”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파스타 주문이 들어왔다. 이 분위기를 살

려서 쭉 이어 가자. 이선균 성대모사를 하겠다고 하고 가슴을 비

둘기처럼 부풀린 후 소리쳤다.


“촤아! 오늘의 첫 번째 메뉴다. 봉골레 파스타 하나!”


힘을 너무 많이 준 덕분에 자! 가 아니고 촤아! 가 되어버렸지만,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카메라 감독들은 무표정했지만, 작가들은

대부분 피식 웃었다. 좋아. 흐름이 살살 바뀌는 것 같다. 가운데

앉은 작가가 의자를 살짝 당겨 앉으며 말했다. 방금 파스타 주문

에도 웃지 않던 작가다.


“너무 짧은데 다른 건 없어요?”


여기다. 여기가 승부처다.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여기서 승패가

갈리게 된다고. 그렇지만 급히 준비해 둔 것들은 이미 다 써버렸

다.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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