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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구사 Dec 14. 2020

잃어버린 형을 찾아 나선 ‘저쪼 위에’의 모험 2

2. 형광팬 캠프

“전화로는 개인기 안 시킨다고 하더니 갑자기 시켜서 깜짝 놀

랐어요. 전 그래도 왠지 시킬 것 같아서 준비한 막춤 췄어요.”


이럴 수가. 망했다. 이런 사악한 제작진 같으니라고! 분명 개인

기 안 시킨다고 했잖아! 개인기를 시킨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

다. 저마다 예상은 했다는 반응이었지만 나는 정말 준비를 안 했

기 때문에 넋을 놓고 있었다. 멍하니 있는 나에게 교복을 입은 고

등학생이 말했다.


“오빠, 목소리가 이선균 비슷한데 성대모사해보시는 거 어때

요?”


뜬금없는 제안에 떨떠름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그거 괜찮겠다

며 얼른 연습해 보라고 했다. 유튜브에 이선균 성대모사를 검색

하니 대부분이 몇 년 전 히트한 드라마의 대사를 따라 한 거였다.


“자 오늘의 첫 번째 메뉴다. 봉골레 파스타 하나. 또르뗄리니

하나. 빨리빨리 못 움직이나!”


급한 마음에 대사를 적어서 따라 해 봤다. 뭐 길게 할 것도 없이

첫음절 “자아” 에서부터 발가락이 쫙 오그라들었다. 생애 첫 성대

모사를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급히 배워야 한다니. 시간이 촉박

해서 발가락을 꽉 오그린 상태로 쉬지 않고 연습을 했다. 성대모

사를 추천해준 학생은 오빠라고 하기는 애매하고, 아저씨라고 하

기는 뭣한 나이 때의 나를 열심히 오빠라고 부르며 응원해줬다.

평생 먹을 만큼의 파스타를 주문해가며 성대모사를 연습하니 짧

은 시간이지만 제법 입에 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분량도 짧고 무엇보다 임팩트가 없었다. ‘빅 재미’, ‘큰 웃음’이 없

다고 당장에라도 박거성의 불호령이 떨어질 듯했다. 고민이 깊어

지는 사이, 어느새 내 앞엔 지원자 2명밖에 남지 않았다.


긴박한 순간 생각난 것은 유재석의 젖꼭지였다. ‘저쪼 아래(젖

꼭지가 아래 있다고 붙여진 유재석의 별명)’의 광팬이니까 나는

젖꼭지가 위에 달린 사람이라는 콘셉트로 나가면 좋을 것 같았

다. 나는 (젖꼭지가) 위에 있고 유재석은 밑에 있어 둘이 평균을

내면 딱 중간에 자리하게(?) 되니 이번에 꼭 유재석 형님을 만나

야 한다고 소개하기로 했다. 인사도 “안녕하세요! ‘저쪼 아래’ 형

님을 좋아하는 ‘저쪼 위에’입니다!”로.


내가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도 발가락이 오그라들고 가슴께가 욱신거린다. 수치스러운 기억

은 화상처럼 흉터가 남고, 떠올릴 때마다 흉터 부위를 욱신거리

게 한다. 내가 정말 합격을 위해 수치심도 다 버렸었구나. 카페로

뛰어가 커피를 시키고 테이프를 빌렸다. 커피는 마시지도 않고

곧장 화장실로 갔다. 핸드타월을 공처럼 말아 젖꼭지 반 뼘쯤 위

에 올리고 테이프를 감았다. 긴장해서 보라색 셔츠 안에 입은 흰

티셔츠는 땀에 흠뻑 젖었고, 테이프가 잘 붙지 않았다. 그 사이 바

로 내 앞번호 지원자가 면접장에 들어갔다. 마음이 바쁘니 손끝

이 무뎌져 테이프는 더 안 붙었다. 이젠 정말 더 늦으면 안 되겠다

싶을 때 간신히 ‘저쪼 위에’로 변신할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셔츠 밖으로 튀어나온 그것은 너무 크고 수

평도 안 맞아서 젖꼭지라고 할 수 없이, 돌기나 뿔이라고 불러야

적절했다.


내가 화장실에서 나옴과 동시에 앞번호의 지원자가 면접장에서

나왔다. 이제 내 차례였다. 면접장으로 들어가면서 어쩌면 불합

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능 프로그램 면접에 오면서 개인

기 하나 준비 안 했다니. 태평하게 수험 공부나 하고 있었다니.


맙소사! ‘저쪼 위에’ 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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