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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구사 Dec 14. 2020

오란씨와 총자 2

2. 형광팬 캠프

집으로 돌아와 동생 앞에서 신발 상자를 열었을 때 엄청나게 혼

났다.


“빨간색이지만 예쁜 빨간색이라 산 거야. 싸서 산 거 아니야.

정말이야.”


동생이 혼을 내다 못해 속상해했기 때문에 결국 옷을 좀 사기로

했다. 당시 내 친구 중에 가장 옷을 잘 입는 ‘총자’라는 놈이 자신

이 디자인한 옷을 팔고 있었다. 옷을 한 장도 팔아주지 못해서 항

상 마음의 짐이었는데 이 기회를 통해 옷도 사고, 친구 옷이 방송

에도 나오면 좋겠다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


“잘 지내냐?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 나 옷도 좀 사고”


한참 말이 없던 총자는 무슨 일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정말 옷

을 사려고 전화했다고 했지만 믿지 않았다. 무슨 심각한 일이 생

긴 건 아닌지. 최근에 다단계를 시작하거나 결혼하느냐고 자꾸

되물었다.


‘아, 나는 옷 파는 놈에게 옷 팔라고 전화해도 믿지 않을 정도

로 짠돌이였단 말인가.’


압구정에서 만난 총자는 여전히 멋쟁이였다. 대학 때 새긴 발목

에 카세트테이프 모양의 문신 말고도 각종 모양의 문신이 새로 생

겼고, 긴 머리와 알 없는 뿔테 안경도 잘 어울렸다. 나도 10년 가까

이 서울에 살지만 제천에 살 때랑 똑같은데, 이놈은 진짜 서울 사

람 다 되었구나 싶었다.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며 술집으로 향했다.

걷는 동안 총자는 디자이너답게 내 옷을 보고 바로 광장시장에서

산 걸 알아봤다. 너 같은 놈만 있으면 나 같은 옷 장사 굶어 죽는다

며 앓는 소릴 했다. 나도 너처럼 보험 가입 안 하는 놈들 때문에 회

사 망해서 공무원 시험 친다고 징징거렸다. 한 잔 두 잔 마시면서

그동안의 넋두리를 풀었다. 여전한 촌놈이든 서울 사람 같은 촌놈

이든 이놈의 서울살이가 얼마나 팍팍했는지 술로 적시지 않으면

삼키기 힘든 이야기들이었다.


사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는 첫 잔을 부딪치기도 전에 알았

다. 총자 얼굴을 본 건 2년 만인데 6살은 더 먹어 보였으니까. 나

도 마찬가지겠지. 그래서 더더욱 총자가 만든 옷을 사야겠다 싶

었다. 옷이 방송에 나갈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한 컷이라도 나가

서 혹시 매출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 도와주고 싶었

지만 나도 사정이 빤한지라 이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한계였다.

술을 마시고 옷을 보러 창고 겸 매장 겸 집인 총자네 옥탑방에

올라갔다. 산더미처럼 쌓인 옷 가운데 맨투맨과 민소매 셔츠 2장,

모자 하나를 골랐다. 한국인은 지인에게 무언가를 구매할 때 특

유의 시트콤을 한바탕 치른다. 시트콤은 먼저 지인이 가격을 물

어보면 주인이 화를 내고 지인은 그런 주인의 주머니에 돈을 강

제로 욱여넣으며 시작된다. 토종 한국인인 우리 둘도 그걸 피할

순 없었다. 봉투에 담긴 돈은 이 손 저 손을 옮겨 갔다가 바닥에

떨어지고 주머니에 강제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가 한바탕 곤

욕을 치렀다. 그래도 마지막엔 총자와 같이 사는 동생에게 강제

로 돈을 쥐여주고 나왔다.


검정 봉지에 옷을 담아 나오면서 자꾸 돈이 모자란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새 옷을 사질 않으니 얼마나 줘야 했는지 개념이

서질 않았다. 캠프 다녀온 후에 총자를 불러 맛있는 제주도 흑돼

지를 사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술로 적시지 않아도 삼킬 수 있는 부드러운

이야기가 쌓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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