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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숲 Apr 25. 2019

'소속'은 존재가 입는 옷

나는 '나'에게 소속된 사람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좋은 옷을 입으면 사람이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확 달라진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도 종종 실감할 수 있다.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물론이고, 나를 잘 아는 사람조차 평소와 다른 옷을 입으면 '오늘따라 달라 보인다'고 하니까.

그 옷을 입은 사람은 분명 똑같은 나인데. 가끔 포장은 그 안의 알맹이를 보지 못하게 한다.


한때 국내 한 신문사의 계열사에서 프리랜서 여행기자로 일한 적이 있다.

내가 맡은 일은 주제에 맞는 국내 여행을 한 뒤, 공식 블로그에 여행 코스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일반인이 실제로 여행을 다녀와서 쓴 듯한 생생하고 실감 넘치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직원의 설명이었다.


당시 나는 라디오를 그만두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할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원고료는 거의 받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적었지만, 막연히 여행과 관련된 글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이라,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여행을 하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얼마 후 나는 작은 고장에서 열리는 축제 현장으로 취재를 가게 되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고장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버스 옆자리의 어르신이 내 어깨에 걸린 커다란 카메라를 보며 물었다.  

"아가씨는 XX군에 무슨 일로 가요?"

지역행사 취재를 하러 왔다고 했더니 어르신은 나를 무척 반가워했다. 그러더니 얼른 뒷자리로 가서 버스에 앉아 있는 몇몇 사람들을 불러왔다. 그 고장의 향우회 서울 지부 회원들이라고 했다. 고향에서 열리는 행사를 격려하기 위해 다 함께 버스를 타고 가던 중이었던 것이다. 고향 일이라면 두 발 벗고 나서는 향우회 회원들에게, 지역 행사를 취재하러 온 '메이저' 신문사 기자 아가씨는 무척 반가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분들은 자신들도 그 행사에 가는 길이라며, 택시 잡기가 쉽지 않을 테니 행사장까지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행사에 대해 잘 아는 고향 분들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몇 번이고 사양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 어르신은 고향에 있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에서 온 OO신문사 기자님이 같이 움직이게 됐으니 차에 자리를 마련하라'라고 말했다. 그 사이 다른 어르신들은 명함을 건네며 내게도 명함을 달라고 요청했다. "프리랜서라 명함이 없어요."라고 말했지만 어르신들에게 그 말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결국 나는 도망갈 틈도 없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향우회 회원들을 기다리던 차로 행사장까지 이동하게 되었다. 향우회 어르신들은 행사장 한편에 마련된 천막 아래 테이블로 나를 데리고 가 또 다른 어르신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 고장에서 '한 자리' 하는 분들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OO신문사 기자님이 우리 행사를 취재하러 왔어요~"

그렇게 소개될 때마다 나는 두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전 정식 기자가 아니고요, 단기로 일하는 프리랜서 작가입니다."


그래도 어르신들은 '기자 선생님, 우리 기념사진이나 한 방 박아주시지요', '우리 행사 홍보 잘 되게 기자님이 힘 좀 써 주십시오'라고 했다. 나는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많은 분들의 명함을 받았고, 그때마다 '저는 기자가 아니에요. 프리랜서라 명함도 없고요.'라고 답했다. 그분들은 버스에서 만났던 향우회 회원 분들과 마찬가지로, 그 말은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내가 메이저 신문사의 기자라고 한치의 의심 없이 믿는 것 같았다.

그분들은 과할 정도로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취재 중인 나를 불러다 음식과 차를 주셨고,  술을 한 잔 권하기도 했다. 감사하기도 했지만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무엇보다도 취재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친절을 베풀어 주시는 바람에, 나는 도망 다니며(?) 취재를 해야 했고, 결국은 다른 일정이 있다고 둘러대며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서울에 돌아온 뒤 향우회 회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점심 식사를 한 끼 했으면 한다는 거였다. 꼭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다고 했다. 바쁘다며 사양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는 회장님과 점심 약속을 잡게 되었다.

그즈음 나는 신문사 일을 관두었다. 푹푹 찌는 한여름 폭염 때문이었다. 장롱 면허에, 차도 없는 처지라  매번 더위에 지쳐 '여행'은커녕 중노동 같은 취재를 하다 돌아와야 했다. 갈수록 날씨가 더워지면서 건강에 무리가 오는 수준에 이르렀고,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향우회 회장님은 삼계탕을 한 그릇 사 주신 다음, 커피를 한 입 들이켠 후에야 신중하고도 진지하게 본론을 꺼냈다. 아드님과의 소개팅을 주선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 소개팅에 대해서는 XX군에서도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  '제가 지금 일도 그만두어서 완전히 백수거든요' 하고 말했다.

"신문사를 그만뒀다고?"

나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었지만, 나는 그 신문사의 정규직 기자가 아니라 프리랜서 작가였다고. 쉽게 말하자면 아르바이트 같은 거였다고. 그러자 회장님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스쳤다. 아드님이 얼마나 좋은 남자인지 어필하던 것도 멈추었다. 회장님의 적나라한 표정 변화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며느리감으로 점찍혔다가 슬쩍(그러나 너무 티 나게) 철회당한, 여름날의 오후.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나란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내가 입은 옷을 보고 날 판단하는구나.'

그러나 그다음으로 든 생각은 '좋은 옷을 입어야겠다'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발심이 들었다. 옷은 옷일 뿐, 내가 아니지 않은가.

물론 멋진 옷을 입으면  좀 더 그럴듯해 보일 수 있지만, 빌려 입은 옷을 나 자신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듯한 옷으로 남들에게 더 대단한 사람으로 비치고 싶지도 않았다.

프리랜서에게 소속은 언제든 벗을 수 있는 옷이라는 것을. 어떤 옷을 입든, 혹은 발가벗겨진 모습으로도 빛나려면 결국 나 자신의 본질을 채워야만 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프리랜서로 살다 보면 다양한 소속을 갖게 된다. 한 번에 여러 소속이 생기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 소속이 없어지기도 한다. 때론 대기업이나 공기업 같은 큰 회사와 일하기도 하고, 때로는 직원이 2~3명인 작은 회사의 하청을 받아 일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 모르는 소속에는 관심이 없지만,  자신이 잘 알고 유명한 소속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인다. 그 때문에 나는 언제나 부풀려진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소개되곤 한다. 특히 방송작가라고 하면 PD들처럼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방송국에 취업한 줄 아는 사람들도 많고, 매일 대단한 톱스타들과 만나고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줄 아는 사람들도 많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나 '유명한' 사람들과 일한다는 것만으로 나 자신도 대단한 사람이라 착각해선 안 된다는 것. 어떤 대단한 소속이든 그것이 나 자신을 증명해주는 이름이라고 믿어선 안 된다는 것.

나의 진짜 소속은 바로 '나 자신'이며, 이 길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내실을 키워야만 한다는 것을.


어쩌면 이건 프리랜서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영원한 소속은 없으며, 소속이 아닌 '진짜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들이 한번쯤 찾아오지 않는가.  인생을 두고 보면, 우리는 모두 프리랜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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