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게으른 여행자 Jul 19. 2021

보내지 못한 말들로부터 배운 것


낮 열두 시 사십오 분. 알맞게 꼬들꼬들해진 짜파게티를 막 불에서 내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냄비를 내려놓지 못한 채 한 손으로 전화기를 쥐고 액정을 확인하니 일주일 전 그 전화다. 카톡이나 문자가 아닌 통화만을 고수하는, 내 주위에 몇 안 되는 이 중 한 사람. 일주일 전에 전화를 받지 않고도 회신을 안 한 게 기억나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오십 대 지인의 용건은 이번에도 자신이 주최하는 모임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몇 차례 완곡히 거절했건만 모른 체하는 것 같아 선약이 있다고 얼버무리곤 전화를 끊으려는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불편한 자리를 피해 버릇하면 발전이 없어요. 그럼 다음에 봅시다.” 나이 들수록 사람을 가려 만나 인간관계가 좁아진다고 생각하던 차에 의미심장한 한 마디였다. 문자로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보낼까 하다 거짓말을 보태고 싶지 않아 그만뒀다. 지난밤부터 고대했던 짜파게티는 왠지 맛이 없었다.      


“불편한 자리를 피하면 발전이 없대.” 저녁에 마주 앉은 믿을만한 동생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 그의 반응은. “으음..... 불편한 게 아니라 싫은 거 아니에요? 나도 싫은 건 그냥 싫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 종일 심란했던 문제가 한마디로 정리됐다. 동생의 말마따나 싫은걸 하지 않기 위해 살다시피 한 내가 아닌가. 크고 좋은 걸 추구하여 싫음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싫은걸 걸러냄으로써 오는 작은 만족감에서 자족을 느끼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싫은 일 몇 가지만 덜어내도 한결 살만했고 싫은 것이 사라진 자리엔 작지만 내게 꼭 맞는 것이 들어왔다. 내게 맞는 걸 잘 모르던 시절부터 여기저기 이것저것 부딪히며 싫은 것을 찾아내어 걸러내듯 살아온 터다. 그걸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 왈칵 고마웠다.      


동생은 모임의 성격이나 구성원의 면면은 어떤지, 왜 가고 싶지 않은지...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구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필요한 관계와 불필요한 관계를 구별하는 능력 정도는  갖췄음을, 나 스스로도 의심하던 것을 의심하지 않고 내 선택을 지지했을 뿐이다.     

 

약해진 마음에 말이 약이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귀하다. 하나마나한 위로나 과한 낙관은 오히려 도움될 만한 말을 찾지 못했다는 정보만을 전달하기 십상이고 꿰뚫어 보는 유능한 눈과 촌철살인은 가뜩이나 위축된 마음을 움츠러들게 한다. 설사 내 쪽에서 상대의 심각한 오류를 짚어주거나 부정적 예측을 적중시켜도, 상대방은 반드시 나를 떠났다. 친구들이 내게 바란 건 점쟁이의 자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필요했던 건 그냥 알아봐 줌이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상대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았는데 내 말은 대체로 과했다. 설사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대도 그렇다.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지하는 말이면 되었다.   

   

요즘 내 20대 친구들과의 대화는 꽤나 즐거운데 아마도 ‘상상하고 참는 법’을 연습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많게는 20년 가까이까지 차이나는 후배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매번 유혹에 시달린다. 멋대로 단정하고 예단과 충고를 남발하고 싶다는 유혹이다. 그래서 자꾸 이 사실을 기억하려 한다. 나는 누군가보다 조금 더 살았지만 무한의 선택지 가운데 오직 한 가지씩만 선택했으며 그에 따라 오직 하나의 삶밖에 살아볼 수 없었다는 것을, 그렇게 완성된 단 하나의 삶에서 본 것만을 얘기해 줄 수 있음을 말이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똑똑한 친구들은 지금의 나를 통해 끊임없이 나의 과거를 추측하고 상상한다. 그리고 그 상상된 과거를 지금 자신의 상황에 대었다 떼었다 하면서 참고할 것이다. 그럼에도 다 드러나지 않았을 서로의 형편을 더 상상해야만 하고, 상상의 오류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대화의 수준이란 왜곡 없는 상상력의 크기와 판단을 아끼는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닐까.      


앞서 지인이 내게 건넨 충고, 불편한 ‘자리’를 피하면 발전이 없다는 말에는 어떤 오류도 없다. 누구도 편한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으며 쉽고 편한 것이 삶을 더 높은 자리로 올려놓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오류 없는 말이어도 어떤 상황이나 맥락 안에서는 공허하거나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내게 그 ‘자리’는 불편한 것뿐 아니라 불필요했다. 그 자리가 필요하다는 판단과 내 삶이 더 발전해야 한다는 전제는 내 것이 아니라 그의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뱉은 수많은 맞는 말들은 또 얼마나 엉뚱한 자리에 가서 꽂혔을지 아득해진다.      


낮과 밤, 두 사람의 말을 통해 나는 오늘도 배웠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만나서 웃다가 돌아오려는 노력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누군가에게 충고할 일이 생겼을 때 내 점심을 챙겨 먹고 남은 시간에 하지는 않을 거라고 여기에 적어두고 잊지 않기로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폭염과 정전의 즐거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