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한적 소비' 도전기-'땡십 만 원'으로 한 달 살기

단순한 소비를 위하여.

by 게으른 여행자


지난 연말부터 시작한 간헐적 단식을 통해 나는 먹는 것이 나를 얼마나 크게 장악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주체적으로 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습관대로 먹고 무의식적으로 먹었다. 의식적으로 먹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때나 먹으면서도 음식 앞에선 불안하거나 초조했다. 한마디로 비효율적 먹기로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먹는 시간과 먹지 않는 시간, 먹는 음식과 양을 의식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나는 비로소 먹는 것의 단순한 즐거움을 알게 됐다. 이번엔 먹는 것이 아닌 소비를 제한해보기로 했다.


새해를 맞아 재정계획을 세우면서 보험이나 금융, 생활비 등 고정 지출 외에 용돈이나 쇼핑으로 내가 어디에 얼마나 쓰는지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름 제한적 주체적 소비를 위해 체크카드를 이용하고 있지만 월 말 입금하는 1차 용돈은 단 며칠 만에 동나기 마련이고 그 후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용돈 카드에 10만 원씩 이체하거나 중순 이후로 접어들면 그마저도 귀찮아 신용카드로 긁었으니 내 소비 규모를 제대로 모를 수밖에.


하루 날 잡고 앉아 숨만 쉬어도 지출해야 할 고정 비용과 평소 소비내역을 따져보았다. 공/사 보험료와 통신비 등 각종 공과금과 매달 비슷한 대중교통비가 한 달 수입을 뚝 떼 간다. 여기까진 이민을 가거나 사금융을 해지하지 않는 한 무조건 내야 하는 돈이기에 최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줄일 수 있는 부분이 없는데 붙들고 씨름해봐야 뭐 하리오. 즐겁게 내자. 문제는 크고 작은 개인적 지출 부문이다. 어디에 얼마를 쓰는지, 가늠이 안되어 굵직한 카테고리를 나눠보았다.


1. 순수 용돈(커피/식당/편의점 등)
2. 사회생활 1 (밥값/술값)
3. 사회생활 2 (경조사/선물)
4. 대중교통 (택시비만, 지하철과 버스는 별도 교통카드)
5. 주거생활 (식재료/생필품)
6. 문화생활 (책, 공연...)
7. 기타 (쇼핑)


한 가지 항목씩 따져보니 카페나 밥 사 먹는 데 나가는 돈은 많지 않다. 하루 평균 만 원. 모임을 많이 갖는 편이 아니기에 사회 생활비도 많이 들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사람들을 만나는데 기껏해야 몇 만 원씩이다. 그러고 보니 밥 사주시는 분이 참 많다. 경조사비는 관례상 단가가 비교적 일정하기에 월 10만 원 정도 잡고 일 년을 놓고 보면 남는다. 고마운 분들께 마음을 표시하는 선물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그런 분이 몇 분 되지 않으니 큰 부담이 아니다. 대중교통 몇 만 원, 여기에 1~2주에 한 번씩 보는 장바구니. 혼자 먹는 밥상이라 크게 돈 들일 일이 없다. 아기나 청소년이 있는 집이 아니니 생필품이나 간식비가 많이 들지도 않는다. 책이나 공연 등 문화비도 부담될 정도로 지출하진 않는다. 별로 쓰는 돈도 없잖아? 그런데 내가 번 돈은 다 어디로??

문제는 저 '기타'. 지난 12월 31일 나는 저 무궁무진 확장 가능하며 평균 내기조차 어려운 '기타'를 확인하기 위해 비교적 산출이 쉬운 위 여섯 가지 항목의 예산을 잡고 7번 기타에 얼마를 배정할지 고민했다. 지금 당장 꼭 필요한 것은 없어 보였다. 꼭 사고 싶은 한 가지를 살 수 있을 정도, 십만 원만 더하기로 했다. 이렇게 확정된 예산 '땡십만 원'을 용돈 통장에 이체했다. 마침 냉장고가 두둑한 걸 확인하고 나는 비교적 자신 있게 '땡십만 원'으로 한 달 살기에 돌입했다. 그 결과...



'땡십 만 원'으로 정확한 금액을 가린 이유는 은연중 본인의 용돈이나 소비 패턴과 비교하실 분이 계실까 봐서입니다. 저보다 많이 쓰시는 분도 적게 쓰시는 분도 모두 각자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나름의 예산이지 '얼마쯤 쓰는 게 좋다'는 아니에요.)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무언가 사거나 사고 싶어 했다.


1월 1일, 새해 첫날부터 홈쇼핑의 쇼호스트 목소리가 더 흥분되어있다. 이제 새해가 밝았으니 새로운 소비를 시작할 때란 듯... 신경 쓴 티가 나는 참신한 기획이었다. 40만 원짜리 무언가를 할인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꼭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것이어서 쿨하게 결제했다. 물론 용돈 통장이 아닌 여윳돈 통장에서였다. 첫날부터 이런 목돈 소비가 있을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기에 조금 당황했지만 '이건 1년에 몇 번 없는 이례적 지출이니 용돈이 아니지.' 나름 스마트한 쇼핑이라며 만족했다.


밖에 나오면 온통 사야만 할 것 같은 것들 투성이었다. 예를 들면 1월 10일, 백화점을 지나다가 엄마가 핑크색 립스틱이 필요하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기존에 쓰시던 게 싸구려라 그런지 발림성이 너무 나쁘다고. 몇 군데서 테스트해보곤 로라 메르시에에서 39,000원짜리 립스틱을 샀다. 로드숍에 비해 비쌌지만 발림성 면에서 저걸 따라오는 로드숍 제품을 발견할 수 없었다. '기타' 항목에 10만 원 여력이 있으니 이 립스틱을 사도 6만 원 정도 여유가 남았다. 아래층 무인양품 매장에선 아주 가벼운 후드 점퍼를 세일하여 10만 원대 초반에 팔고 있었다. 가볍고 편안한 겉옷을 찾던 내게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싼가! 환호도 잠시, 잠시 이성을 발휘해 이 점퍼를 샀을 때 남은 예산으로 20일을 살 수 있는지 따져보았다. '기타'에서 남은 6만 원. 나머지는 외식 값과 사회 생활비에서 충당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이제 필수소비 외에 아무것도 사지 않고 모임을 줄이면 새 점퍼를 사도 별 무리 없이 한 달을 살 수 있었다.


예산이 빠듯해지니 먹는 것의 종류가 바뀌었다.


가장 먼저 줄인 건 식비였다. 그날부터 나는 저녁 약속이 없는 날 외부 작업이나 미팅 후엔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외식비를 아꼈다. 외식 단가를 낮추고 식재료비를 줄이고자 유기농에서 일반상품으로, 아보카도유에서 일반 식용유로 품질을 낮췄다. 간편 닭 가슴살 팩 대신 냉장고에 있는 것들로 단백질을 보충하고 빵 장인이 만든 호밀빵 대신 파리바게뜨 식빵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마음에 꼭 들었던 캐시미어 니트와 메이크업을 돋보이게 해 줄 하이라이터도 눈에만 담아놨다. 이번 달 미용실은 엄두도 못 냈다.


눈물 젖은 샌드위치 도시락들

소소한 소비 외에 대단한 쇼핑을 한 것도 아닌데 중순이 채 되기 전에 '땡십만 원'으로 시작했던 용돈은 20만 원 아래로 줄어들었다. 돌발 소비 없이 예상 카테고리 안에서만 소비했지만 만나자는 약속을 거절하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이 나이에 차마 '돈이 없어서'라고 말하기도, 구구절절 내 프로젝트를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술값 한번 내면 남은 용돈 절반이 줄어든다. 이제 나는 보름 가까이를 정말 아무도 안 만나거나 염치없이 얻어먹거나 얼굴에 철판을 깔고 칼 같은 각자내기를 해야 했다. 새로 산 점퍼는 집에다 걸어 놓으니 어쩐지 손이 안 가 한 번밖에 입지 못했는데...


가장 놀라운 건 집에 있어도 밖에 있어도 사고 싶은 것이 매일 생긴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쇼핑을 전혀 즐기지 않고 많은 여성들이 즐기는 쇼핑 품목, 옷과 메이크업에도 관심이 없다. 둘러보거나 사고 싶은 몇 가지는 차나 찻잔, 책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나마도 같은 텀블러를 6년째 쓰는 사람이다. 어디에 덕질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매일 무언가를 사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필요를 느낄 때마다 별생각 없이 소비할 땐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지 않는다고 사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소비하지 않기의 가장 큰 장애물은 스마트폰. SNS를 하다가도 온라인 서점에 들아가서 신간을 훑어보다가도, 사야 할 것들이 끊임없이 노출된다. 그냥 둘나 보자고 클릭했던 물건들은 살 때까지 내 스마트폰 화면에 떠다녔다. 각종 쇼핑 앱마다 가득 찬 장바구니가 달이 바뀌기만을 기다리며 대기 중이다.


이번 달이 일주일 남았고 현재 내 용돈 잔고는 정확히 61,484원이다. 이번 주 토요일 오랜만에 만나는 후배들과 점심 약속이 있고 내 유예된 장바구니는 계속해서 쌓이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으며 성공한다고 해도 다음 달에는 도전하지 않을 듯하다. (엄밀히 이 도전은 첫날 홈쇼핑에 지갑을 열면서 이미 실패했다.) 하지만 예산을 늘리더라도 이번에 경험한 의식적 소비 패턴은 지키도록 노력할 것이다. 어떨 때 왜 사고 싶은지 그 이유와 시점은 타당한지 고민해볼 것이다.


1월 23일 현재 용돈 내역 차트. 쇼핑 비용이 예산을 한참 초과했기에 나머지 영역을 모두 줄였다.

'돈이 없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말할 수 없는 사람들

먹는 것을 제한하고 관찰한 간헐적 단식보다 소비를 제한하고 관찰한 제한적 소비가 훨씬 힘들었다. 일정 시간 먹지 않기가 나 자신을 다스리는 비교적 내면적 활동이었다면 소비를 제한하는 건 내 욕망을 줄여 없이 산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특히 사회 구성원으로 제대로 구실 하려면 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수중에 돈이 없는 상황을 상정하지 못했다. 돈이 없다고 하면 현금이 없거나 신용카드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몇 종류의 신용카드로 무장한 요즘 사람들에게 '예산' 이란 말은 집이나 차를 살 때나 해당되는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이번 주 쓸 돈이 빠듯해서 그렇게 비싼 식당에 가기엔 부담될 뿐인데. 하긴, 정말 수입이 뚝 끊겼거나 공과금조차 낼 돈 없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과연 돈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제한적 소비를 통해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와 관련된 일로 쓰는지도 알게 됐다. '사고 싶다', '사도 될까', '무엇을 살까'... 떠오르는 물건이 생길 때마다 스마트폰만 열면 후보 상품군이 끝없이 보인다. 선택에 또 한참. 결제를 할지 말지 고민하는데 또 한참.


사람과 어울려 이뤄지는 소비를 제외하고 무의식적으로 이뤄지는 소비의 대부분은 제한해도 사는데 큰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당장 새 물건이나 새 식료품을 들이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필요에 의해 소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냥 내가 사고 싶었던 경우가 많았고 지금 사지 않으면 안 될 물건은 거의 없었다. 얄팍한 통장 잔고를 되뇌며 지나쳐온 물건들, 지금 안 사면 정말 큰 손해를 보는 것 같았던 물건들이 지금은 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무언가가 떨어지기 전부터 쟁여놓고자 하는 욕구도 불안의 반영이었다. 한 달간 사고 싶었지만 못 샀던 물건들 중 당장 필요했던 건 없었다. 나머지는 돈이 생길 때 예산에 맞추어도되는 물건들이다. 아무 때나 끊임없이 무언가 사들이는 동안 나는 어떤 불안을 몰아내고자 했던 걸까.

소비는 전시되고 추앙받는다. 소비하지 않음은 환영받지 못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누군가는 시즌마다 새로운 라인업의 명품을 잘만 걸치고 1인분에 3만 원이 족히 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식사를 한다. 넉넉한 소비는 전시되고 추앙받는다. 반면 제한적 소비는 궁상이나 인색으로 폄훼되기 쉽고 최대한 성공했을 경우가 겨우 '티 나지 않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거나 아무 때나 척척 살 수 있는 인생을 꿈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좋은 물건들을 사용하는 데서 오는 편리함과 쾌적함, 소비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 경제적 자유를 이뤄냈다는 성취감 등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유통업 등 내수 발전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존중되어야 한다.


제한 없는 소비를 꿈꾸는 사람들이 정상으로 여겨지듯, 제한적 소비를 꿈꾸거나 실천하는 사람들의 소신도 존중되어야 한다. 부자가 될 꿈을 포기한 정신 승리자의 세상 물정 모르는 헛소리가 아니라 소비를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일상을 컨트롤하는 사람, 소유를 줄임으로써 오는 해방감의 맛을 아는 사람... 이번엔 실패했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이다.


'돈을 벌어 세금을 내고 수입 규모 안에서 자신의 소신대로 갖고 싶은 물건과 경험을 사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 부족하면 사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단순한 소비생활이다. 자신의 소비패턴이 이런 단순함을 넘어 뭔가 복잡하게 느껴진다면 내 소비 방식과 규모부터 점검해보길 추천한다. 돈 쓰는 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뤄지는 기본적인 행위다. 그 거대한 체제가 짜 놓은 판에서 나는 내 지갑만이라도 장악하기 위해 신경 쓸 것이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는 말을 따라 해 보면,
내가 돈을 쓰는 방식이 곧 이 세계와 나와의 관계다.

비록 다음 달 예산은 늘리겠지만 어떻게 쓸 것인지, 계속 고민하고 기록할 것이다.


(하루와 일상에 대한 깨알같은 내용을 책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aladin.kr/p/TN2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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