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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양연화 Apr 20. 2024

관계를 끊으려면 손가락을 잘라야 할까요?

영화, 이니셰린의 벤시.

<이니셰린의 벤시 포스터>


‘이니셰린의 벤시’는 작년 내가 세 번을 본 영화다. 사소한(보이는) 소재를 이토록 몰입감 넘치고 풍부한 이야기로 끌어내다니…. 경외심을 넘어 좌절감을 준 애증의 시나리오.     


아일랜드 본토에서 조금 떨어진 섬, 이니셰린. 그곳엔 오랜 시간 우정을 쌓아온 두 남자 콜름과 파우릭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콜름은 파우릭에게 절교를 선언하는데, 그 이유는 ‘널 사랑하지 않아 다른 이유는 없어’이다. 연인 사이도 아니고 이 무슨 개똥 같은 이유인가! 더구나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지루한 이 섬에서 친구라곤 콜름밖에 없는 파우릭에게 콜름과의 절교는 세상과의 단절이다. 일방적인 절교를 받아들일 수 없는 파우릭은 계속해서 그의 주위를 맴돌며 다시 친해질 기회를 엿보는데 콜름은 이런 파우릭때문에 숨이 막힌다.    

 

콜름은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로 동내에서 인싸이고, 소 키우며 사는 파우릭은 마을에서 두 번째로 바보 취급당하는 아싸다. 지적인 콜름과 ‘다정이 병’인 파우릭이 그동안 절친으로 지냈다는 게 믿기 어려울 만큼 두 사람 사이 접점이 보이지 않는다. 짐작건대 아마도 콜름은 순진한 수다쟁이 파우릭을 그동안 견뎌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견딤이 임계점을 넘었고 이에 절교를 선언, 하지만 파우릭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의미 없는’ 수다나 떨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은 콜름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노인)을 사색과 작곡으로 보내고 싶다. 결국 아무리 끊어내려 해도 끊어지지 않는 파우릭을 향해 그는(양털 깎는 가위로) 자기 손가락을 잘라 던져버린다. 세상에, 손가락 다섯 개를 다 잘라버릴 만큼 끊어내고 싶은 관계는 무엇일까? 무슨 대단한 음악을 만든다고 평생 친구를 저렇게 매몰차게 대할 수 있을까? 사람은 죽어도 예술은 남는다지만, 예술이 삶보다 가치가 있단 말인가? 처음엔 파우릭에게 감정 이입된 나는 콜름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최근 내 마음속엔 콜름의 심정을 강력하게 이해하는 변화가 생겼다.   

   

나는 주는 친구들이 많다. 김치에서부터 각종 반찬, 직접 만든 마스크에서 안경집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이렇게 고마운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즐거운 일이고, 감사한 일이어야 하거늘 못돼 처먹은 내 마음은 그들이 하는 얘기가 한 시간을 넘기면 집중력이 떨어졌다. 동시에 친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내가 나빠서 괴로웠다. 정확히는 내 시간이 아깝고 그렇게 느끼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글을 쓰면서 인간관계가 재편성된 나는 친구의 반이 사라졌고, 그 빈자리에 글 쓰는 동료들로 채워졌다. (동료들과 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종일 떠들어도 행복하다) 하지만 여전히 한 달에 한 번은 얼굴 보자는 친구가 열 명이라치면 한 달에 열흘은 ‘의미 없는’ 수다에 내 시간을 써야 한다. 기한을 설정해 두고 그때까진 시간이 안 된다고 하면 쉽겠지만, 글을 쓰는 일은 퇴근도 없고 기한도 없다. 대체 그 글은 언제 끝나냐는 질문에는 나도 그 끝을 몰라 숨이 막힌다. 만나자는 연락에 ‘지금 당장 써야 하는 기획안이 있어서 못 만난다’고 구구절절 거절하는 심정이 구차하다. 그렇게 기껏 노트북 앞에 앉았는데, 또 다른 친구가 힘들다며 만나자고 하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에 갇힌 심정이 된다. 힘들다는 친구를 외면할 수도 없고, 내 일을 계속 미룰 수도 없으니.      


현재 장편 소설과 드라마를 쓰는 나는 노트북 앞에 있어야 할 물리적으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 종일 쓰는 건 아니지만 쓰는 ‘몇 분’을 위해 내 몸을 그 앞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모르는 친구들은 무슨 대단한 글을 쓴다고 유세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콜름에게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양손을 움켜쥐고 있으면 원하는 새로운 것을 잡기 어렵다는 것쯤은 뻔히 알지만, 친구란 존재가 내게 그리 가볍지 않기에 쥐고 있는 손을 펴지 못해 괴로운 것이다. (이런 상징적 은유로 콜름이 손가락을 자른 게 아닌지 추측해 본다)     


친구들 사이 다정하게 남고 싶은 마음과 그냥 날 내버려 두지 않은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무수히 부대끼는 동안 속절없이 봄만 간다. 손가락을 자르지 않고, 서로 마음이 상하지도 않으면서도 내가 원하는 만큼 내 시간을 충분히 갖는 방법은 정녕 없을까?  

    

PS: 문득 떠오른 사실, 지금 난 콜름의 입장으로 내 좌표를 설정했는데 누군가에게 

    손가락을 끊어낼 작정을 하게 만드는 파우릭일 수도 있으니... 모든 관계가 참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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