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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 Dec 21. 2021

[영화 에세이]#21. 드라이브 마이 카

영화관을 나서는 그대들에게: 징표교환의 매커니즘

머리말     


 바야흐로 거리두기의 시대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표정을 가리게 되었고 비대면 접촉은 일상이 되었다. ‘맞닿지 않음’이 디폴트가 되고 표준인 세상. 그러나 이러한 작금의 현실은 코로나19의 출현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미 만연하게 존재하였던 거리두기를 코로나19로 인하여 현현하게 깨달았을 뿐. 소통의 부재는 이미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의 소통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하여 더욱 효율적으로 변하였으나, 근본적으로 비접촉과 비대면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기계적인 소통으로 전락한다. 물리적 거리가 초월된 기술적 세계에서, 접촉의 가치는 희석된다. 재난 이전에도 우리는 이미 디아스포라(diaspora)였다.


 한편 영화라는 매체는 본질적으로 단절을 함유한다. 연극은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어 있음에도 하나의 공간을 점유하며 상호교류가 가능하다. 연극에서 배우들이 생성하는 것들은 관객의 관람과 동일한 시공간적 지위를 갖는다. 객석에서 우리는 그들의 땀을 느낄 수 있고, 배우들의 체온은 우리에게 전달되며 때때로 그들의 손을 잡기도 한다. 반면 영화는 제작의 시기와 관람의 시기가 어긋난다. 관객은 카메라의 눈을 빌어 스크린을 통해서 영화가 만들어낸 환영의 공간을 관람하게 된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전지적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기도 하며 인물들 사이를 헤집기도 하며 스크린 속 세계를 종횡무진 누빈다. 그러나 카메라의 시선은 기계적이며, 그 위에 탑승한 우리의 시선은 수동적이다. 우리는 영화 속에 존재하는 이들과 눈 마주칠 수 없으며, 영화를 관음할 뿐이지 영화와 대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단절을 넘어 영화가 우리에게 건네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아야 할 터.


 하마구치 류스케는 연극을 영화의 질료로 삼으며 타자, 더 나아가 세계와의 ‘소통’에 대해 고심한다. 그는 <아사코>에서 동일본대지진 후 남겨진 인물들을 통해 신뢰의 붕괴와 단절감, 그로써 표상되는 포스트-재난 시대의 아이러니 속에서 살아나가는 현대인을 다루었다. <해피아워>에서는 언어적 의사소통의 한계와 그로 인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말하며, ‘연결-불안-재연결’의 소통과정을 제시하였으나 인물들은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 피투(被投)되어 홀로 고군분투해야 하는 존재들인가.


 <해피아워>에서 그려낸 방법론에 따르면 ‘연결’은 그 자체로 온전하지 못하다. 언제 중심이 흐트러지고 접속이 끊어질지 모르는 불안을 유발하는 상태이다. 그렇기에 상대와 중심을 맞추기 위해서는 다시 자신의 몸에 귀 기울이고 ‘재연결’을 시도해야 한다. <해피아워>에서 인물들은 불안을 마주한 채 재연결을 위하여 각자의 도약을 시작하며 끝마쳤다. <해피아워>에서의 '연결-불안'이 나-타자 간의 일대일 구도였다면, <아사코>에서는 바쿠-아사토, 아사코-료헤이로 이어지는 상실과 불신을 다루며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불안'을 연쇄적으로 확산하였다.


 하마구치는 <해피아워>에서 결론 내리지 못한 ‘재연결’의 방법론을 <드라이브 마이 카>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그는 타인과의 관계를 끝없이 뻗은 도로처럼 바라보는 듯하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이지만 소실점을 향해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이는, 실제론 가까워질 수 없을지 몰라도 하나의 평행선이 다른 평행선과 어떠한 상호작용을 통하여 두 평행선이 계속 뻗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 현실을 살아나가는 법이라고 말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재연결' 또한 <아사코>의 ‘불안’처럼 연쇄작용을 통해 번진다. 뻗어나가는 도로는 다른 도로와 만나 교류하고 중첩되며 세상에 드리운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그의 영화에서 ‘몸’을 통해 드러난다. <해피아워>에서 제시하는 ‘연결’의 방법은 몸을 통한 비일상적 의사소통이다. 이는 상호교환성을 내포하며 자신의 크기를 줄이지 않고 온전히 등을 맞대는 것으로 가능하다. 등을 감각하는 행위는 등을 타인에게 닿게 하며 나의 등을 느끼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몸의 감각 작용은 일종의 '교류'이며 '지향적'이라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몸과 세계 혹은 타자는 하나가 능동적 역할을 하고 다른 쪽은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애매한 관계 방식을 이루고 있으며, 몸은 상호감각의 주체로서 상호 얽힘을 통해 세계에 대한 상징체계를 형성한다. 본 비평은 메를로-퐁티의 사유에 의거하여 <드라이브 마이 카>를 바라보며, 그의 영화 내에서 작동하는 ‘징표의 교환' 및 자신을 들여다보며 스스로 살아내는 법에 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영화관을 나서는 그대들에게: 징표교환의 매커니즘] 



1. 연극 – 시선과 몸짓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극중극(play-within-a-play)의 형태로 두 개의 연극이 등장한다. 먼저 영화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이 연극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끝끝내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는 오늘도 오지 않으며 연극은 막을 내린다. 한편 <바냐 아저씨>에서 바냐는 예술대학 교수인 매형 세레브라코프를 동경하고 그를 뒷바라지하며 인생을 바쳤다. 하지만 바냐는 그가 순수한 예술가가 아닌 저열하고 통속적인 인물임을 알게 된다. 바냐는 교수의 실체를 깨닫고는 우상이었던 그를 향해 총을 쏜다. 이와 같은 행위를 통해 바냐는 진실된 자신의 모습, 그러나 보잘것없이 남겨진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바냐 아저씨>를 다루며 주목해야 할 점은 주체와 세계의 충돌이다. 오토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의 원형 운동은 이어지는 쇼트에서 자동차의 바퀴와 매치 컷 된다. 이는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운동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공회전이다. 자동차라는 구속된 공간에서 주체성을 상실한 채 놓여있는 가후쿠는 마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같은 장소에만 머무르는 것과 다름없어 보이며 한편으로는 단편소설 <셰에라자드>에서 하바라가 감금되어있는 모습이나 <기노>에서 기노가 술집에 마음을 두고 있는 모습처럼도 보인다.


 반면 <바냐 아저씨>는 우상을 향해 총을 쏘며 정체로부터 탈출한다. 총을 쏘는 행위는 자신의 우상을 고발하며 자발적 복종에서 탈피하여 자기 주체성을 주창하는 발화이다. <바냐 아저씨>는 ‘고도’와도 같은 죽음이 다가오더라도, ‘고도’와도 같은 이상이 다가오지 않는다고 해도, 혹은 이상이 부서지고 추한 진실만이 남게 되어도 우리는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서 바냐와 소냐로 이행되는 과정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주체성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무대 위의 연극뿐 아니라 무대 아래의 연극도 존재한다. 연극은 배우가 희곡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프롤로그에서 오토는 정사를 통해 희곡을 창조해낸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배우의 행위를 언어적-대사와 비언어적-몸짓으로 구분 지어, 언어적-대사는 각본을 읽는 것으로 비언어적-몸짓은 감정을 신체화하는 것으로 나타낸다. 하마구치에게 연극이란 비언어적-몸짓으로 배역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도식의 목적은 그가 실제로 영화를 제작할 때 사용하는 방법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감정을 배제한 채 수없이 각본을 읽어 언어적-대사가 체화되게 한 후, 현장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담아 연기하도록 지도한다. 체화된 대사에 감정이 덧입혀지는 순간 배우들은 극의 배역이 겪어냈을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극의 배역과 자신 스스로가 일치되어 놓여질 때, 배우는 배역을 ‘진실로’ 수행할 수 있게 되며 대본은 개별화되고 개인화된 채로 배우에서 푼크툼을 일으킨다. 그는 배우들이 처음 맞이하는 감정으로 촉발되는 어떠한 순간을 포착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배우가 홀로 감정의 촉발을 이룰 수는 없다. 나의 감정이 타인의 감정을 촉발하고, 이 촉발은 다시금 나의 감정을 유발하여, 지각의 주체이자 지각되는 대상인 몸을 장소로 하여 작동하게 된다. 메를로-퐁티의 말을 빌리자면 몸 틀(le schema corporel)을 ‘처음으로 체득(體得)하는 순간’이며 '교류'이고 '지향성'일 테고, 영화 내적 요소로 표현하자면 ‘징표의 교환’이다.


 이는 ‘이중감각’의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의 오른손이 왼손을 만질 때, 왼손은 경험되면서도 그 경험됨을 느낀다. 이를테면 왼손은 오른손을 통해 지각될 수 있으며, 역으로 오른손에 대한 감각 역시 왼손을 통하여 지각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이중감각의 경험은 타자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확장된다. 예컨대 책상을 만지는 손을 생각해본다면, 나는 손에 느껴지는 책상의 감각을 느끼는 것으로써 책상을 알게 된다. 역으로 책상에 대해 느낌으로써 책상과 맞닿아 있는 나의 손에 대해 알게 되고 그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나의 손 자체에 대해서도 알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 있어서는 관객과 스크린 사이에 물리적인 거리가 부여되며 관객은 스크린을 만질 수 없다. 따라서 관객이 영화를 지각하는 방법은 시선으로 대체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중감각'을 ‘시선’으로 치환하여 드러낸다.


 앞서 영화는 본질적으로 단절을 지닌다고 하였다. 이러한 단절을 전제로 하였을 때, <드라이브 마이 카>에 존재하는 모든 연극은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는 간혹 연극이 되어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해피아워>에서 하마구치는 배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하게끔 하는 것으로 이러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담는다. 미디엄 쇼트로 인물들을 바라보던 카메라는 어느새 인물들의 중심으로 접근하여 시점 쇼트로 자리 잡아 숏/역숏의 대화 구조(이하 ‘연결 쇼트’)를 이룬다. 이 지점에서 인물들은 ‘연결’되며 카메라의 시선에 탑승한 우리도 이러한 ‘연결’에 동참하게 된다. 한편 <아사코>에서도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장면은 수차례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장면들에서 우리는 그들의 내면을 읽어내기 어렵다. 오히려 그들의 시선은 단절에 가깝다. <아사코>에서의 위와 같은 장면들은 숏/역숏의 구조를 이루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은 서로 마주 보지 못하며, <아사코>의 마지막 장면처럼 나란히 놓여 만나지 못한다. 하나의 배우가 홀로 감정의 촉발을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마주치지 않는 시선은 ‘연극’이 되지 못하며, 우리는 이들의 시선에 의해 스크린 밖으로 배제되어버린다.


 <해피아워>에서 준은 우연히 친구의 아들, 다이키를 만나게 된다. 이 두 사람은 임신을 동반한 성행위를 한 이들이며 대모-대자(godmother-godson)의 관계로 비유된다. 다이키는 준의 배에 귀를 대어 태동을 듣는다. 비일상적 의사소통이 일상에서 행해지는 순간이다. 이는 <해피아워>가 말하는 소통의 가장 근원적인 모습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이 둘이 헤어지며 인사하는 장면은 연결 쇼트들로 이루어진다. 반면 가후쿠와 오토의 정사는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성행위이다. 관계를 맺는 가후쿠와 오토의 눈동자는 공허하며, 그들은 카메라를 바라보지만, 시선은 서로에게 닿지 못한다. 그들은 ‘연결’되지 못한다.


 또 다른 무대 아래의 연극은 가후쿠의 차에서 이루어진다. 가후쿠는 오토가 녹음한 <바냐 아저씨>를 들으며, 오토의 목소리가 없는, 비어있는 바냐의 대사를 채워나간다. 앞서 하나의 배우가 혼자서 감정의 촉발을 이룰 수는 없다고 하였다. 연극에서의 배역은 타인의 배역과 상호작용하면서 무대 위에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빈 대사만 홀로 읊으며 차 안에서 머무르는 가후쿠는 자신의 존재를 구축해내지 못한다. 그의 연극에는 언어적-대사만 부유하며, 오토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오토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그는 진실로 바냐 역을 수행할 수 없다. 그는 우상을 향해 총을 쏠 수도, 아니 어떠한 몸짓도 하지 못한다. 뒷문이 없는 뒷좌석에 자리 잡은 그는 <기노>의 주인공처럼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갈 수 없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2. 두 명의 바냐

    

 오토가 정사를 행하며 읊는 이야기는 단편소설 <셰에라자드>에서 기인한 것이다. 셰에라자드는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그녀는 1001일 동안 매일 밤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사형집행을 미룬다. 즉, 그녀는 이야기를 생성함으로 죽음을 한껏 밀어낸 채 삶을 살아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셰에라자드>에서 주인공은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와 동치되며, 정사를 통해 이야기를 읊는 오토 또한 같은 선상에 있다. 오토 역시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이야기를 끝맺지 않으며 삶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남학생의 집에 몰래 잠입한다. 그의 방에서 그녀는 한 가지의 물건을 가져가고 한 가지의 물건을 두고 가는 것, 영화 속 표현에 따르면 ‘징표의 교환’으로 남학생과 관계를 맺는다. 그녀의 행동이 지속될수록 두 사람의 세계는 물이 섞이듯 섞여가며 중첩된다. 이러한 ‘징표의 교환’은 하마구치 류스케가 생각하는 참된 ‘연결’의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며, <드라이브 마이 카>를 아우르는 서사의 층위에서 진행된다.


 오토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학생과 침입자는 두 명의 바냐, 가후쿠와 다카츠키를 동시에 은유하며 상호 얽힘의 양상을 보인다. 남학생을 다카츠키로, 그의 방에 침입한 자를 자신의 외도를 목격한 가후쿠에 대한 은유로 상정하면, 가후쿠가 그녀와 다카츠키의 세계에 침투하였기에 그녀는 다카츠키와의 관계를 지속해나갈 수 없었고, 그와의 관계가 종결되게 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때 오토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다. 그녀의 죽음은 가후쿠의 '부작위에 의한 살인'이다. 오토가 살아가는 방식은 이야기를 창출하며 이야기를 끝맺지 않음에서 온다고 하였다. 그녀는 이야기를 끝맺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토가 창조하는 각본의 내용은 연모하는 남학생을 떠올리며 행하는 여학생의 자위이며 실제 행해지는 연극은 두 남녀의 성관계이다. 이야기에서의 여학생은 실제로 각본을 행하는 오토와 중첩되며 오토가 언어적-대사와 비언어적-몸짓을 모두 수행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녀는 가후쿠와 징표를 교환하고 싶어 했으며, 가후쿠가 알아채지 못하게 자신의 징표인 '연필통의 연필처럼 너무 세세해서 전해지지 않는 무언가'를 놓고 왔을 것이다. 허나 각본의 섹슈얼한 행위에 가후쿠가 부재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가후쿠의 연극은 언어적-대사와 비언어적-몸짓이 상응하지 못한다. 오토는 진실로 연극을 수행하려는 상태에 가깝지만 가후쿠의 연극은 그러하지 못하다. 진실된 모습으로 오토를 마주할 수 없는 가후쿠는 감정을 유예하며 오토를 회피하였고, 그녀는 더이상 이야기를 생성할 수 없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반면 가후쿠를 남학생의 위치에 놓는다면 다카츠키는 침입자가 된다. 다카츠키는 자신을 텅 빈 상태라고 칭한다. 이와 같은 발언은 <존재와 무>를 통해 사르트르가 제시한 대자존재(對自存在)를 상기시킨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유일한 존재로 존재하는 ‘나’는 절대적인 주체로 존재한다. 그러나 또 다른 절대적인 주체성을 가진 타자와의 관계가 성립될 때, 나는 타자의 시선에 의해 존재론적 지위가 변화되어 절대성을 잃고 즉자화(卽自化) 되며 비주체적인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사르트르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나의 세계에 발생하는 내출혈(hemorragie interne)이다. 따라서 다카츠키에게 시선이란 파괴적인 것이다. 그가 타인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그들의 의중에 따라 곡해되는 것에 반감을 보이는 것과 그에 대해 폭력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오토는 이야기 속에서 시선 아래에 벌거벗은 채로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다카츠키의 사랑은 침입자의 강간으로 묘사된다.


 한편 남학생이 여학생의 행동을 모두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모습은 가후쿠가 오토의 불륜을 외면하는 모습과 중첩된다. 그녀는 CCTV가 설치된 것을 통해 남학생이 그녀의 행동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게 되며, 오토는 거울을 통해 가후쿠를 목격하며 가후쿠가 자신의 불륜을 눈치챘음을 알게 된다. 이에 오토는 사실을 고백하려 하지만 가후쿠는 그녀의 고백을 회피하였고 이는 그녀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가후쿠는 거울 혹은 CCTV를 통해서만 그녀를 들여다보려 하며 진정으로 그녀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으며 이야기를 완수하지 못하고 죽은 그녀는 유령처럼 그의 세계에 목소리로 머무른다.


 흥미로운 점은 창조된 이야기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은 서로 중첩되며 교환한다는 점이다. 가후쿠-침입자의 도식에서 가후쿠가 오토를 살해하였다는 근거는 가후쿠-남학생으로 상정한 각본에 가후쿠가 부재한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한편 다카츠키-침입자의 도식에서 오토가 CCTV를 통해 침입자를 살해하였음을 고백하는 것은 다카츠키와의 혼외정사를 고백한다는 점에서 다카츠키-남학생의 도식으로 귀결된다. 이처럼 두 이야기는 서로 섞이며 상호 얽힘의 상태로 나아간다. 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2014, 무라카미 하루키)의 <드라이브 마이 카>, <셰에라자드>, <기노> 그리고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와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까지 다수의 작품이 상호작용을 통해 재조합 및 재구성되어 하나의 각본을 이루는 구조와도 닮아있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3. 무대에서 내려가기 – 되돌아온 곳은 이전과 똑같은 곳이 아니다    

 

 “돌아온 곳은 정확하게는 이전과 똑같은 장소가 아니다.”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대사이다. 영화에서도 무대는 각성의 공간으로 활용되며, 무대 위의 인물들은 성장한 채로 무대 아래에 발 디딘다. 영화는 40여 분의 프롤로그 이후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히로시마로 향하는 자동차를 비추며, 카메라는 자동차를 쫓으며 우리를 히로시마로 초대한다. 이곳의 인물들은 모두 상실의 상흔을 지니고 있으며, 각자 나름의 연극에 참여하고 있다. 히로시마는 하나의 무대로 작동하며, 영화의 본문을 하나의 연극으로 환유한다.


 그들이 각자의 연극을 몸짓으로 행하여 삶과 일치하는 순간, 그들은 연극을 진실로 수행하게 되고, 영화는 연극이 된다. 가장 먼저 ‘연극’을 수행하는 이는 다카츠키이며 그의 '연극적 장면'은 <해피아워>의 시퀀스를 환기한다. 다카츠키와 가후쿠를 번갈아가며 비추던 카메라는 어느새 그들 사이로 자리 잡는다. 그들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직시하며 대화를 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같은 이를 사랑했으며, 그녀를 상실하였고,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상처가 있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우리의 시선은 맹점을 지닌다. 우리는 맹점으로 인하여 타인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볼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의 모습 역시 온전히 바라볼 수 없다. 고로 우리의 시선이 가진 결함을 받아들이는 순간에서야 우리는 사물과 세계를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으며, 우리 모습을 온전히 바라보려면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서 바라보아야 한다. 세계 안에서의 맹점은 몸짓으로 행하는 이중감각이며, 시선으로 치환된 징표의 교환이며, 연결됨이며, 연극을 진실로 행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중첩되고 공명한다. 다카츠키는 오토가 생성한 이야기의 뒷 내용을 가후쿠에게 고하며, 침입자이자 남학생이였던 가후쿠를 발견한다. 그로써 가후쿠의 상흔과 오토의 흔적을 이해하였고, 자신을 되돌아본다. 다카츠키는 가후쿠에게 일갈한다.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다고. 차 안에서의 대화는 J컷된 총성과 함께 다음 장면으로 이동한다. 총성의 주체는 다카츠키. 그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으로 주체성을 회복하였고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인다. 무대 위의 그는 수염을 떼고 옷을 갈아입으며, 영화에서 퇴장한다.


 타카츠키가 연극에서 이탈함에 따라 연극은 취소되거나 가후쿠가 직접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아직 자신을 바라보지 못한 채로 오토를 바라보고 있는 그는 진실로 바냐 역을 수행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위해 미사키의 고향으로 떠난다. 가후쿠가 미사키의 고향으로 향한 이유는 마치 오토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세계의 교류로 보인다. 가후쿠는 미사키에 고향에 이르러 그녀의 세계에서 미사키의 과거를 듣는다. 가후쿠와 오토의 아이가 살아있었으면 딱 미사키의 나이였을 터이고, 미사키의 아버지는 가후쿠와 나이가 같으며 가후쿠가 아내를 죽였듯 그녀는 어머니를 죽였다. 그들은 비슷한 상흔을 지니고 있다.


 가후쿠는 거울을 바라보듯 같은 상흔을 가진 미사키를 응시하였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난 흉터를 보며 자신을 직시하고 자신의 흉터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흉터를 징표로 가져왔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었을 것이다. 차 안에서 이루어지던 뒷좌석-운전석의 ‘마주 보지 않는 대화’는 운전석-조수석의 대화를 거쳐 훗카이도에 도착해서야 ‘마주 보는 대화’에 이른다. 그는 <기노>의 마지막 장면처럼 스스로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두 남녀는 선루프 너머 손을 내밀며 담배를 피운다. 같은 아픔, 같은 상처, 같은 회복. 가후쿠는 미사키를 이해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 주체성을 회복하였다. 그는 이제 부서진 우상을 마주할 수 있으며 그를 향해 총을 쏠 수 있다. 그는 바냐의 역을 받아들이며 연극을 완수해내었고, 무대 아래로 되돌아온 그는 무대의 오르기 전과 달라졌을 터이다. 그는 이제 몸짓으로 살아갈 수 있다. 유예되었던 스스로의 감정을 끌어안을 수 있다.


 연극은 소냐가 바냐를 뒤에서 안으며 수어로 마지막 대사를 읊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이 행위는 야외연습에서 이유나와 제니스 창이 ‘무언가를 느꼈던’ 장면을 소환한다. 그 순간은 앞서 말하였듯 비언어적-몸짓을 통해 배우가 배역을 ‘진실로’ 수행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며 감정의 연쇄작용으로 체득을 이뤄내는 순간이다.(*) 이 순간은 소냐의 손짓과 바냐의 표정을 통하여 객석에 앉아 그들을 ‘마주 보는’ 미사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연극이 끝나고 영화는 미사키를 비춘다. 그녀의 흉터를 가져간 대신, 그녀가 가후쿠에게 건네받은 것은 자동차일 것이다.      


미사키는 한국에서 온 두 인물을 통해 치유의 실마리를 잡은 듯하다. 연극과 수어라는 서로의 징표를 나누어 가지며 상실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땅에 정착하여 사는 그들의 모습을 담습하려한다. 그리하여 미사키는 가후쿠의 자동차를 타고 한국에 왔다. 가후쿠의 무대였던 자동차에서 그녀는 이제 관객이 아닌 배우로서 그녀의 연극을 수행해야 한다. 드디어 몸짓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바냐가 진정으로 소냐가 될 준비를 하는 미사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Drive my car.” 자신이 극복해낸 무대이자, 치유의 방법론이었던 자동차를 자신의 징표로써 건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 후에 이 장면은 소냐와 바냐의 구도로 나타난다. 그들이 몸짓으로 치유해나가는 과정이다.
* 실제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감정을 배제한 채 대본을 읽게끔 하였고, 자연스레 마음을 따라가도록 연기지도를 하였다고 한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꽃을 사려고 잠시 차가 멈춰선 후 살짝 후진하는 장면은 가후쿠가 꽃을 사고 싶어서 차를 멈춘 것일테다. 이 장면도 상흔을 마주보는 작업 중 하나이다.

맺음말 - 도약     


 <고도를 기다리며>와 <바냐 아저씨>는 영화 전체에 대한 비유로 작동한다. 이러한 비유는 가후쿠와 이유나의 연극 장면을 통하여 ‘연극적 엔딩’과 ‘영화적 엔딩’이 맞닿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지점에서 영화를 연극과 동시에 끝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암전 후 다시 밝아지며 미사키를 비춘다. 영화를 끝맺어야 할 순간에 끝맺지 않고 암전과 암전 사이에 미사키를 다루는 데에는 이 영화를 복합적인 층위의 형태로 드러내고 싶은 의도가 서려 있다.


 가후쿠의 불안은 미사키와의 관계에서 온 불안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옆좌석의 미사키와 징표를 교환하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재연결’을 이뤄냈다. 가후쿠에게 영화의 머리말은 ‘불안’이고 본문은 ‘재연결’의 과정이라면, 미사키는 본문에서 ‘불안’한 상태에 놓여있고 맺음말에서 ‘재연결’의 실마리를 잡는다. 같은 상처를 지닌 자들이 연쇄적으로 서로에게 징표를 건네주며 희망은 번져나간다.


 이 지점에서 약간의 도약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하마구치는 관객과 영화 사이에서 징표 교환을 시도하며 인물들에게 주어진 희망을 우리에게까지 확장하려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극중극으로 드러나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가, 혹은 또 다른 바냐인 다카츠키가 가후쿠의 삶에 손을 뻗쳐 그에게 살아나가는 법을 일깨워 주었듯이, 가후쿠를 바라보며 다카츠키가 자신을 직시하였듯이, 영화는 가후쿠와의 동행이 미사키에게 닿아 그녀 역시 힘껏 살아내기를 바라며, 그로써 관객인 우리도 영화관을 나서며 어떠한 희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도록 손을 건넨다. 만약 미사키가 무사히 스스로 살아낸다면, 소통의 상실이라는 재난의 시대에 함께 몸담고 있는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지 않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다카츠키가 카메라를 마주 볼 때 우리는 가후쿠와 일치되어 ‘연결’을 건네받았고, 가후쿠가 카메라를 들여다볼 때 우리는 미사키가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과 눈 마주치며 관음을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라게 되고, 나의 세계는 그곳이 아닌 이곳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삶은 스크린 속에 있지 않다. 살갗으로 느끼는 객석의 감촉에서 나는 존재한다. 다카츠키는 무대를 내려와 스스로를 마주하였다. 가후쿠는 자신의 무대를 건네는 것으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우리는 영화에서 벗어나 제각각의 자동차에 몸을 싣고 현실로 복귀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미사키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을 일치시키며 운전석에서 바라본 도로를 비춘다.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도로를 훑으며 우리를 히로시마로 초대했던 카메라는 엔딩 크레딧과 동시에 다시금 우리를 영화 밖으로 나서도록 한다. 어쩌면 이 장면은 영화라는 무대에서 벗어날 우리를 통해 미사키를 응원하는 것이자, 옆에 앉은 이를 마주 보며 힘껏 뻗어나가길 바라며 영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징표가 아닐까.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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