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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목지 Sep 04. 2023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우울에 관해서2

2. 우울과 친구가 되었다.

애매한 우울에 관해 첫 글을 쓴 후 2년이 훌쩍 넘었다. 그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우울은 그 때 나에게 두려움이었는데 지금은 반려(?)감정이 되었다. 두려움이 많이 사라진 건 우울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인지 알아내려는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의 일이다. 오늘도 이른 새벽에 목끝까지 우울함이 밀려왔지만 잠깐이었다. 우울은 영원하지 않고 대신 완전히 떠나지도 않는다.

2년동안 이러저러한 일들을 헤쳐나가다 보니 본의 아니게 우울이라는 감정과 타협점을 갖게 되었다.


이건 재채기처럼 어쩔 수 없는 거구나.

그리고 단편적인 감정이 아니구나.

내가 행복해도 찾아올 수 있는 거구나.

그렇다면 너는 내 친구인가?


이런 지경까지 와버린 것이다. 지경이라고 표현을 했지만은 나는 이 변화가 반가웠다. 영원히 가라앉는 기분 속에서 더이상 두렵지 않아도 되니까. 불쑥 찾아오는 불청객이지만 지나갈 것을 알기 때문에.


우울이 친구가 된건 계기가 있었다. 2년간의 X같은 회사생활때문이다. 직장운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짬이 날 때 수영을 배우게 되었다. 그 당시는 특히 내 안위가 불안하던 시기였다. 어디로든 도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는데 수영이라는 운동이 나를 구원해줄 것 같았다. 물 속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니까.


그런데 곧 내가 그 물을 몹시도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이 무서우면 몸이 긴장하면서 점점 가라앉는다는 사실과 함께.

발차기, 자유형 팔돌리기를 배우는 첫 두 세달간은 물에 대해 편견을 버리는 시간이었다. '아 나를 둘러싼 것들을 두려워하는 순간 나는 뭘 해도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물에 몸을 완전히 맡기는 연습부터 했다. 그 연습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물 속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사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낯설고 두려운 상황에 몸을 맡기는 마음수련에 끊임없이 매달렸다. 거기에 답이 있는 것처럼.



사실 나를 괴롭히는 것들은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인간이 무균의 환경에서 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내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건 억울했다. 미심쩍지만 나를 둘러싼 환경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혐오스러운 것들을 살살살 치워보면 내가 가진 것, 할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 감사한 것들이 분명히 있었다. 이 들을 에너지삼아 내 삶을 꾸리는 재미는 조그만 한 평 땅에 씨앗을 뿌리는 재미와 비슷했다. 물론 무섭고, 증오스러운 것들이 더 자극적이기 때문에 그 것들을 제치고 머릿속을 긍정적인 자원으로 채우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은 운이, 인연이 알아서 풀리게 해준다고 믿고 있었다. 모든 영역을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다 믿는 순간 불행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부정적인 생각은 빡쎈 운동을 하며 없애고, 긍정적인 생각들은 내 일상을 가꾸면서 키워나갔다. 이 삶을 유지하려고 애쓰다 보니 우울이 오면 '어 왔어?' 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친구가 되었다. 작은 우울은 불시에, 큰 우울감은 두달 주기로 찾아왔다. 미세하게 규칙적으로. 하지만 이 방문을 내가 별 수 있나. 우울이 찾아오든 오지 않든 내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우울과 친구가 되는 것은 삶에 대한 환상을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다를것이라는, 다른 환경이었다면 행복할것이라는 기대를 이제는 놓아주었다. 별 것 없는 현실도 내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현재 내가 머무는 이 공간과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이왕이면 여유를 가지고, 가진 형편에 맞게 나를 최대한 보살피기. 그렇게 현재에 몰입하자 점점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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