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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씨 Mar 08. 2022

06. 명품이 던진 질문 '적정 소비'

버버리 패딩



출처 버버리 홈페이지

적정 소비에 대한 질문



명품을 해마다 사면서 거듭 던지게 되는 질문이 있었어요.

그건 나의 적정 소비는 과연 어느 지점일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영하 20도였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10시간이나 날아간 유럽의 온도 가요. 언제 또 올까, 싶어서 마음은 하고 싶은 거 투성이었는데, 막상 외출하면 너무 추워서 실내를 떠올리고, 실내를 찾아 나서선 도저히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물값보다 저렴한 유럽의 맥주만 마시고 또 마셨습니다. 그러다 오스트리아를 찾았고, 아웃렛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웃렛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오스트리아를 굳이 방문했다는 게 더 진실에 가깝습니다만



친구는 제품 입고일에 맞춰 중국인들이 몰려와 금세 동이 난다는 몽클레어에서, 저는 합리적 가격에 버버리를 구입할 수 있다는 버버리에서 패딩을 샀습니다. 당장의 생존과 당분간의 따뜻한 겨울을 위해서요. 사실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기념비적으로 갖고 싶었는데, 혹한의 추위가 버버리 패딩으로 마음을 굳히게 했습니다. 두툼한 카디건과 코트만 가져간 영하 20도의 온도를 경험해본 적 없는 저에게 오리솜털 충전재의 버버리 패딩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안락한 따뜻함을 선사했습니다. 그렇게 맹렬한 추위유럽을 그 패딩을 입고, 뿌듯하 돌아다녔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비싼 걸수록 매일매일, 이라는 모토 아래 부지런히 입고 다녔습니다.  근데 유럽에선 안 그랬는데, 한국에선 입을수록 편하지 않더라고요. 눈과 비로부터 패딩 충전재가 오염되지 않도록 기능성 원단을 썼다는데, 되레 그 귀한 걸 하는 마음이 돼 버렸어요.  그렇게 편안함과 먼 경험을 선사했는데...우선,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  그 패딩을 입고 있으면 신경이 곤두섰어요. 행여 패딩 소매에 물이 닿지는 않을까, 비누 자국이 남진 않을까, 조심조심하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또 음식 먹을 때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매운 걸 먹으면 행여 빨간 게 튀지 않을까, 삼겹살을 먹으면 기름이 튀는 건 아닐까, 고기 냄새가 배진 않을까, 테이크 아웃할 때 커피가 흐르진 않을까... 드라이클리닝 비용도 더 비싼 데 조심해야 해... 걱정이 끝이 없었어요. 이보다 비싼 가방도 잘 들고, 바닥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놓는  나인데, 옷은 또 다르네... 불편하다 불편하다 불편하다를 입에 달고 다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불편한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여주 아웃렛을 찾았어요. 그리고 버버리 매장을 방문했습니다. 제 버버리 패딩이 제가 산 가격보다 2배나 비싼 가격에 팔고 있더라고요. 기분이  좋았습니다. 부다페스트 왕복항공권 50만 원을 떠올리면 더 뿌듯했고요. 물론 옷에 대한 부담감이 풀리지 않는 숙제였지만요.  나는 이 패딩을 서울에서 입으면 불편한가, 이 불편함을 해소하려면 어찌해야 하나, 라는 물음표가 한동안 절 쫓아다녔습니다.





지하철에서 만난 아가




지하철 안이었습니다. 옆자리에 스크린에서 튀어나옴 직한 아가가 엄마 품에 안겨 있었어요. 정말 귀엽더라고요.  저는 그 아이에게 장난을 치기로 했습니다. 고전적인 놀이 얼굴 가리기였죠. 그리고 곧바로 후회를 합니다. 괜히 장난을 걸었다, 라고요. 아가가 너무나도 해맑은 표정으로 제 트위드 재킷의 실을  뽑아내기 시작했거든요. 서양 아기라 그런 지 힘이 엄청나더라고요. 순간 얼음이 되었어요. 근데 이 상황이 가장 난감한 건 그 아가의 엄마였어요. 상황을 파악하고선 바로 아이를 옆에 서 있던 아빠에게 건네주려는데, 아가는 재밌는 놀이를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생각보다 힘도 셌고 그렇게 제 옷은 속수무책으로 망가지고 있었습니다. 아가의 엄마는 계속 제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고요. 근데 저도 과실이 있잖아요. 제가 장난을 치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태까지 오지 않았을 거라는. 그렇게  머리 속이 아주 복잡해졌는데, 그때 출입구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가족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연출하며 하차를 했습니다. 저는 올올이 빠져나온 트위드 재킷을 수습하며 저 가족의 진짜 목적지가 이곳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더라고요. 그저

괜히, 아는 체를 해서 이 사단을 만들었구나, 후회와 자책만 남았습니다. 




그 트위드 재킷은 다행히 수습 불가능의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바늘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조금 손을 보니,  아가의 만행을 숨길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도 잘 입는 애정템이고요





이때의 경험이 제게 적정 소비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줬습니다.  지하철을 탔을 때, 귀여운 아가가 옷을 망쳐도 화가 나지 않는 정도가 아닐까,하고요. 과시를 위해, 미를 추구하기 위해, 편안함을 추구하기 위해 옷(or명품)는 이유가 획일적일 순 없을 테지만 적어도 있을 수 있는 사고에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너그러울 수 있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범위가 적정 소비가 아닐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나이스클랍 트위드 재킷이 제게 적정의 소비였고요.




그럼 남은 숙제는 버버리 패딩인데요. 1년에 10번, 10년을 소비하자.라고 구체화하니까 좀 마음이 편해집니다.  뭐 10년 후에도 제 체형이 크게 불지 않으면 충분히 입을 수 있다는 생각이 더해지니 더 가뿐해지고요. 요즈음 트렌드 친환경을 떠올려도 -옷 장 안의 옷을 고쳐 입으면서 오래 입는 것 - 전혀  손색이 없을 옷이라고 판단하고요. 점점 추워지는 한국 날씨를 생각해도 든든합니다.  때를 묻혀가며 앞으로도 잘 입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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