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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씨 Mar 18. 2022

10. 명품의 가치를 찾는 여정

명품 사는 게 제일 쉬웠어요

제주도에서



명품을 샀습니다. 살까, 말까 고민을 많이 한 결과였습니다.  명품 없이도 잘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명품을 사고는, 한동안 명품을 지긋이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아끼려는 마음이 커도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가의 물건이 처음이었거든요. 촌스럽지만 그랬습니다. 그렇게 명품을 모셔 놓았습니다. 그러다 ‘이건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갑자기 찾아왔어요.  아끼다 뭐 되는 상황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최악을 면하기 위해 매일 명품을 들고 다녀 보기로 했습니다.



비가 내릴 때 가방을 보호하면, 가품이 아니라죠? 저도 한 때 그랬습니다. 근데 매일 들고 다니니까, 가방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게 돼더라고요. 익숙해지고, 친해지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변화라면 변화였습니다. 근데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더라고요. 그건 욕망입니다. 하나를 가져서 안분지족 하게 된 게 아니라, 갖고 싶은 게 더 생기더라고요. 옷을 사면, 그 옷에 어울리는 신발, 가방을 파급적으로 갖고 싶어지는 것처럼요.  



또 샀습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아주 쉬웠습니다. 그러길 몇 차례 반복하니까, 처음 명품 매장에서 느꼈던 어색함은 사라지고, 자연스러움이 남더라고요. 또 명품 앞에서  더 이상 작아지지 않았습니다. '나도 근사한 걸 갖고 있다'라는 자부심이 아니라, 명품 자체를 인식하지 않게 된 그런 상태였어요. 예전에  특강을 들은 적이 있어요. 강사님이 아들이 도박에 빠져서, 응급 처방으로 돈을 잃고 오면 강사님이 되레 돈을 주는 당근을 줬다고 하시더라고요. 같은 논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잃은 돈 = 결핍이 있을 땐 결핍에만 시선이 집중된다면, 결핍이 사라졌을 때엔 더 이상 그것을 신경 쓸 필요 자체가 없어지는 거요. 저는 그걸 경험합니다.   



처음 혼자 여행을 떠나기 전 느꼈던 감정처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혼자만의 생각으로 견고하고 높은 벽을 스스로 만든 거였습니다. 실상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하나 정도 가질 수 있는 선택의 영역인데 말이죠.  다 먹지도 못할 여러 개의 음식을 시키는 게 행복인 사람도 있고, 가끔 피곤한 날 택시를 선택하는 게 행복인 사람이 있고, 한 모금의 담배가 행복인 사람이 있듯이 저는 1년에 한 번, 특가 항공권으로 여행 가면서 면세점 또는 현지에서 명품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하는 게  제가 발견한 행복이었습니다. 부끄러워할 일도 자랑할 일도 아닌, 그저 제가 조합해낸 행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제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근사한 것이라고 말해볼게요. 미국의 아웃렛 매장, 케이트 스페이드에서 마음에 드는 신발이 있어서 신어 보겠다고 점원에게 말을 건넸어요. 근데 점원이 덧신을 건네주더라고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불편함인데, 위생적이다, 감탄을 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한동안 역시 미국은 달라, 라며 미국을 찬양하고 다녔다는..... 또 이탈리아에서는 프라다 매장에서 새로운 시스템을 접했습니다. 쾌적한 쇼핑을 위해 인원수를 제한 하는 건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는데,  매장에 들어서면 입구에서 점원이 고객들에게 번호표를 한 장씩을 교부해주더라고요. 구매할 제품을 점원에게 말만 하면 부여된 번호에 구매할 상품이 등록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슈퍼에서처럼 계산할 물건을 카트에 넣고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니 편리하더라고요. 근데 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고가의 물건이 고객 손에서  훼손되는 걸 막으면서 공간도 여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똑똑한 방법이구나, 역시 감탄했습니다. (사소한 거에 감동을 잘하는 편입니다)



또 다른 세계는 절약입니다. 명품을 구매한 만큼 일상에서 낭비를 없애려고 했습니다. 지하철 정기권을 애용하고, 패밀리 세일을 애용하는 식이었습니다. 소비를 무조건 포기하는 게 아니라, 소비를 무분별하게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예산 범위에서 적정선을 지키려는 노력입니다. 월소득의 10% 안팎의 보험료를 책정하는 것처럼 저만의 적정선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근데 하다 보니 궁상이, 빈곤이 아니라, 절약하는 기쁨이라는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시행착오를 겪긴 했지만 구매일을 적어 놓고 사용량을 기록하다 보면, 단가가 높더라도 필요한 양만큼 구매하는 것이 합리적인 소비더라고요. 월플(1+1)이나 투플(2+1) 행사를 의심스럽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또 이런 것도 덤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가성비만 따지던 소비에 명품이라는 소비가 더해지니까, 소비의 스펙트럼이 크게 확장되더라고요. 자연스럽게 비교의 기회를 갖습니다. 그 결과는 가격이 높다고 꼭 품질이 우수한 건 아니다,였어요. 비가 거세게 내릴 때 가급적 사용하지 말라는 샤넬 우산이 대표적인 예겠죠. 덕분에 가격도 착하면서 질까지 훌륭한 제품의 진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근데 또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명품을 써보면서  명품 대하듯 다른 물건을 귀하게 다루니까 더 만족도가 높은 소비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명품이 명품의 대우를 받는 건 고품질의 희소한 가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가치를 알아주고 그 가치에 걸맞은 귀한 대우를 해주는 소비자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읽는데, "어떤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면 결국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문구가 있더라고요. 제가 줄곧 하고 싶었던 얘기였기에 바로 메모를 했습니다. 명품을 매일 쓰다 보면, 여러 질문을 마주치게 됩니다. 맨 처음 마주한 질문은 "왜 나는 명품을 사는 걸 주저할까."였습니다. 그다음은 "왜 나는 명품을 집에 모셔만 두고 있는 걸까?"였고요. 그 후엔 "이 가방엔 어떤 옷이 어울릴까?", "이 가방은 언제 들고나가지?"에서 "왜 나는 '내'가 아니라 가방에 내 모든 걸 맞추고 있을까?"라는 망치로 한 대 맞은 듯한 질문을 마주하게 되는 단계까지 나아갔습니다. 망치의 위력은 상당해서 그 시점을 기점으로 "내가 좋아하는 가방은 어떤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책 한 권 정도는 가지고 다닐 수 있으면서 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숄더백 스타일이 좋더라고요. 그렇게 미처 몰랐던 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나는 과연 명품 대하듯 나를 대하고 있을까"라는 종착역과 같은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답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아니다, 였거든요.

커피잔을 선택하면 그 잔에 드립커피 내려주는 카페에서



그때부터 제가 저한테 좋은 걸 해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고가의 명품을 사는 게 아니라, 대단한 일을 꾀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작고 소소한 일상에서의 변화였습니다. 힐 대신 운동화를 선택하고, 라면을 먹을  예쁜 그릇에 예쁘게 담아서 먹, 글씨를 쓸 때 시간이 없다고 대충 갈겨쓰는 게 아니라 정갈하게 쓰려고 노력하거나 하는 일이었습니다. 필요한 것도 가능하면 예쁜 걸 사서 소중하게 대하려고 노력하고요. 작은 변화였지만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물론 좋은 방향이었고요.



결국 명품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 '그 소중한 느낌'을 명품이 아닌 나에게 향하도록 하는 일, 그 단순하고도 자명한 일이 강사님이 말한 명품의 가치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건 물건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이요.



어김없이 시간은 흘렀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건 계속할 것인가, 아닌가로 판가름이 난다고 생각하는데, 명품쇼핑 역시 그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신생아에서 청장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접어든 기분이었어요. 나쁘다, 싫다의 느낌이 아니라, 이 정도면 명품에 있어선 가보고 싶은 만큼 가봤다, 라는 마스터(?)의 느낌입니다. (에르메스 버킨백 정도는 사야, 마스터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거 같지만 뉘앙스만 받아들여주세요) 그리고 더 이상 혈기 왕성한 청년기만큼 열렬히 열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예 담을 쌓고 살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돈만 넉넉하다면 어떻게 명품을 싫어할 수 있죠? 이 멋지고 근사하고 아름답고 비싼 것을요.라고 말하지만 샤넬 오픈런을 하면서까지 명품을 손에 넣고 싶진 않고, 득템한 항공권으로 미국,유럽을 가게 된다면 또 합리적인 가격이라면 기꺼이 지갑을 열고 싶다 정도라고 이해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조금 부족한 설명입니다. 명품 하나 없이도 멋진 데다 아름답고 거기에 근사함을 풍기는 사람들도 분명 있으니까요. 명품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얘기를 접할 때 더 매력적이더라고요. 또 그런 분들의 특징이 명품 소비를 쉽게 평가절하하지 않고, 또 명품 앞에서 작아지지도 않더라고요.  공부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못하는 거에 전혀 콤플렉스가 없는 학생 같다고 할까요? 공부도 안하면서 좋은 성적은 받고 싶고 그래서 스트레스만 받는 학생보다 저는 훨씬 마음이 가던데...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암튼 본인만의 색깔을 분명히 하되, 그 색깔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 그 어려운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이 저는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전에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어쩌면 명품을 사는 일이 아닐까, 라는 것이었어요. 진짜 근사한 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과 적절히 싸우면서 사랑하는 일, 돈만 있다고 해낼 수 없잖아요. 또 외국어를 마스터하는 일, 역시 돈으로 살 수 없죠. 물론 돈이 더 많이 지불하면 조금 수월할지 몰라도요. 또 건강한 몸 - 제가 요즘 헬스를 하면서 더 느끼는 바가 큰데 - 역시 돈만으론 어렵습니다.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 운동도 매일 꾸준히 해야 하고, 건강식에 대한 공부도 해야 하니까요. 근데요.  명품은요. 그냥 돈만 주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어요.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가 가장 저렴하게 산 명품은, 이탈리아에서 산 프라다 구두인데요. 패밀리세일 + 추가 20% 할인 + 택스 리펀드 = 대략 10만원에 샀습니다. 이탈리아 로마 왕복 비행기 티켓은 50만원 가량 줬고요. 1년 전 예약하면 유럽 여행도 저렴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명품 관련 기사에 허세, 허영이라는 단어가 보이면 '나 고작 십만원에 허세 허영의 아이콘이 된 거야?라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만나기도 하는데 솔직히 조금 뿌듯하더라고요. 명품 하나로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서요. 명품은 나와 다른세계라고 선 그었더라면 던지지 않았을 수많은 질문을 경험하지 못하고, 답 역시 찾지 못했을테니까요. 그렇게 명품의 가치를 찾기 위한 제 여정은 진짜 종착에 도착한 거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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