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점차 없어지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내가 취업활동을 열심히 하던 2006년 즈음에는 대기업 그룹의 "대졸 그룹 공채"라는 것이 전체적인 채용 트렌드였다. 삼성, SK 등 재벌기업들이 특정한 시점에 맞춰 각 계열사들이 필요로 하는 대졸 신입 사원을 한 번에 채용하는 것이 대졸 그룹 공채였다.
나도 이 대졸 공채를 통해 나의 첫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14명의 입사 동기중 면세 사업부에 발령받은 동기는 4명이었다.
당시 삼성은 대졸 공채 직원에 "3급"이라는 직원 등급을 매기고 있었고, 우리 회사에서는 저 3급 직원을 "주임"이라는 직급으로 불렀었다. 사원-주임-대리-과장-차장-부장 (현재는 사원-주임-선임-책임 제도로 바뀌었다)으로 이어지는 계급 조직 내에서 우리 "대졸 공채"동기들은 사원을 건너뛰고 주임으로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인사팀에서 우리를 면세점 판매업무로 배치한다고 했을 때 나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멋진 성공 드라마의 주인공이 초반부에 나중에 본인의 성공을 가져올 일을 처음 배우는 장면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그래 맞아. 사업의 기본인데 판매 경험을 쌓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 이 경험은 소중하게 남을 거야!"라고 말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또 분명히 내 부족한 인성으로 "나는 이 일을 잠시 경험하는 것이지 내가 할 일은 분명히 이게 아닐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업점에서 몇 달의 시간이 지나자 자괴감이 찾아왔다.
호텔과 면세점이라는 사업은 고객에게 대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업의 기본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직무가 존재한다. 이 "업의 기본"인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업무로는 호텔 사업 쪽을 살펴보면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프런트 직원은 물론이거니와 각종 식음업장의 조리 및 서비스 인력, 객실을 정비하는 인력이 필요하다. 면세 사업에서는 판매 사원, 물류 관리 인력, 보세 운송 인력 등이 서비스라는 업의 기본을 위해서 필요한 직무이다.
물론 기업이라는 것이 이렇게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운영되지 않기 때문에, 조직을 관리하고 사업을 기획하고, 자금을 운용하며, 회사 인력을 관리 감독하고, 판매를 위한 제품을 구매하거나, 마케팅 계획을 수립하고, 각종 행정 관련 업무를 수행 및 지원하는 조직들도 당연히 필요하다.
이렇게 다양한 직무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에 회사에는 "대졸 공채"말고도 굉장히 다양한 경로를 통한 채용을 진행했다. 호텔 자체 공개 채용, 서비스 전문직, 파트 타이머 전환 등 많은 채용이 었었지만, 대개의 경우 당시의 회사는 이렇게 채용된 직원을 "사원"이라는 직급으로 묶고 있었다. 면세점 판매 직군의 대부분의 직원도 이 사원 직급에 속해 있었다.
기존 직원들 사이에서 이 대졸 공채의 존재가 혼란이 있던 것이 분명했다. 당시 영업점에는 대졸 공채가 아닌 경로로 입사해 사원을 거쳐 주임, 대리, 과장이 된 선배들도 있었다. 사원에서 주임으로 승진하는 최소 근무 연한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그 연한은 정말 최소 근무 연한이었지 그 기간만 일하고 승진을 시켜주지 않는 것이 회사의 관례였기 때문에 주임에 오르기까지 당시의 선배들은 많은 시간을 사원으로 근무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막 졸업하자마자 주임으로 온 이 인간들은 도대체 뭔데 오자마자 주임일까 하는 의문도 분명히 존재했고 의문을 넘어 텃세도 분명히 존재했다.
주임급 이상 직원들이 모이는 회의에도 부르지 않았었고, 주임 이상의 결재가 필요한 업무들에 대한 교육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내가 속한 브랜드의 상품만 팔도록 했다. 판매일이 아니라 회사가 돌아가는 일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사원들이 주임님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하는 회의가 열렸던 적이 있다는 소문도 들었었다. (정말 아직도 소문이었길 바란다.)
공교롭게도 선배 주임님들이 부재한 날에 이 시퍼렇게 어린 젊은 "공채 주임"들만 매장에 있던 날 반드시 주임급 이상이 결재를 해줘야 하는 일이 생긴 적이 있었다. 어떤 이름 모를 사원이 내 결재가 필요하다고 무슨 종이를 가져왔는데 정말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건 글자인데 내가 결재를 해도 될지 몰라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던 적이 있다.
"아, 그거 너네들이 사인하면 안 되는데, 어쩔 수 없지. 너도 주임이니까 일단 결재해서 줘. 다음에 그런 경우 생기면 어떻게 할지 회의하고 알려줄게."
대졸 공채는 내 죄가 아닌데, 왜 우리는 그때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을까.
이제와 돌이켜 보면 회사의 업무도 모르고 판매업무를 무시하며 거만하게 대접받고 싶어 했다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는 도덕책 혹은 정신 수양의 결과물 같은 얘기로 끝을 낼 수도 있겠지만,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것이 아니다.
15, 16년이 지난 이제야 나는 당시 내가 느꼈던 자괴감의 원인을 찾아냈다. 당시에 대졸 공채로 뽐내고 주임으로 대접받고 싶어 했던 것은 젊은 시절에 부족했던 인성의 결과물이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그것이 아니었다.
바로 회사가 구성원을 대하는 방식, 더 자세하게는 각각의 직무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상호 업무의 가치를 구성원에게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소매 유통업에서 판매라는 것이 가지는 행위는 중요하다. 그러나 고객에게 사업의 목적인 상품을 잘 판매하는 것이 계속 발생하는 성공은 판매 사원만 잘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사업 기획, 자금 운영, 제품 구매, 마케팅 등 모든 회사의 기능이 함께 일한 결과물로 그 브랜드를 그 매장에서 그 가격에게 팔 수 있는 결과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최종 판매 단계에서 고객이 상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앞서 말한 모든 일이 허사가 되기 때문에 판매는 다시 중요하다.
회사의 판단 미스는 여기서 생긴다. 회사는 대개의 경우 판매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판매를 담당하는 직원들에게 그 직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로만 전할 뿐 그들을 올바로 처우하지는 않는다. 각종 판매사원 조회나 미팅에서는 말할 것이다. "여기는 현장입니다. 유통업에서 판매 현장만큼 중요한 것은 없어요."
그렇게 중요한 직무에 대한 대우는 어떠한가? 당시 판매 직군으로 일하는 사원들은 승진이 늦었다. 한번 판매 직군으로 입사하면 계속 판매 직군에 있어야 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하 기업의 직장 생활자에게 승진이라는 보상이 가지는 의미는 분명하다. "당신은 이 회사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고 인정받고 있다."
왜 승진을 시키지 않았을까? 말로만 현장의 가치를 중시했고, 실제 그 직무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회사 전체가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대접을 받고 몇 년을 버티고 버티다 주임, 대리, 과장이 된 사람들 앞에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주임으로 온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생각해보자. 본전 생각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현장이라는 고립된 환경에서 모호한 감정적 카르텔이 생성된다. 그렇기에 위에서 말한 텃세가 일어난다.
사회생활이 처음인 젊은이의 부족한 인성이 가져온 자괴감은 함께 같은 직무에서 일함으로써 없어졌어야 했다. 이 직무가 회사에게 있어 소중하고 필요한 일이구나,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회사라는 조직이 느끼고 가르쳐줬어야 했지만, 당시의 내 첫 회사의 영업점은 그저 주임 직급을 벼락처럼 들고 온 굴러온 돌로 여겨지는 그런 회사의 모습이었다.
막연히 현장 직군을 연차가 찼다고 꼬박꼬박 승진시키고 급여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현장의 직원들에게도 당신도 중요하지만 다른 직무가 왜 중요한지, 백오피스라고 불리는 지원 부서의 업무가 지니는 가치가 무엇인지 공유가 필요하다. 그래야 현장이 아닌 곳은 편하게 일한다는 막연한 무시가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왜 현장이 중요한지, 현장이라는 곳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공유되어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원 부서가 하는 일이 현장에 영향을 끼쳐 회사에 영향을 끼친다는 당연한 사실을 너무도 당연하게 체득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단 하나의 정답은 아니겠지만, 각각의 서로 다른 직무별로 요구되는 승진의 수준 또한 분명히 다를 것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직군의 직무 교육을 제도화하여 성공적으로 이수했을 경우 이를 반영한 승진 제도를 운영하고 특정 직무 이상에서는 보직이 당연히 순환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업점 발령은 도태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도록.
나의 일은 너무도 당연하게 타인의 일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돌고 돌아 사업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게 된다. 그렇기에 나의 일도 소중하며 당신의 일도 소중하다. 당신의 일은 언젠가 나의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업무가 잘나고 어떤 업무는 못난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는 회사의 일을 함께하고 있는 것뿐이다.
함께. 그것이 회사(모일 會 모일 社)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