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제가 가진 가장 오래 전의 기억은 어느 기차역에서 누군가의 등에 업혀 목이 찢어져라 울던 장면입니다. 저를 업은 사람은 막내 이모였을 겁니다. 글쎄, 그건 확실치 않군요. 이모가 맞다 치고, 옆에는 외할머니가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기차에 오르는 사람은 엄마, 바로 내 어머니였어요. 오르는 중이었는지 기차 창밖으로 얼굴을 비쳤는지, 글쎄, 중요하지 않겠죠. 하여튼 업힌 등에서 떨어질 듯 몸부림치며 울었던 것이 내 생애 첫 기억입니다.
기차역의 기억으로부터 몇 년 지난 뒤, 장면은 산골짜기로 바뀝니다. 하루에 두 번인가 버스가 들어올 때마다 동네 아이들이 놀다 말고 우르르 정류장으로 몰려가던 마을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근무하던 국민학교 바로 뒷집 별채에서 여섯 살의 제가 엄마와 살았습니다. 그 곳의 기억은 제법 많습니다. 냇가에서 미꾸라지는 제 손가락 사이를 잘도 빠져나갔죠. 동네 아무 집에나 들어가 밥도 먹고 잠도 잤습니다. 아침에 집에 들어갔을 때 아, 그 계란 후라이 냄새. 마을 사람들은 아이가 아프거나 하면 우리 방 문을 두드렸어요. 어머니가 가르치던 교실 맨 뒷자리에서 받아쓰기 하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주인집 아들 이름이 종현이인 것도, 그 애와 낫을 가지고 놀다가 손가락 벤 일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이상한 것은 동생 준이가 분명 그 시기에 같은 공간에 있었을 텐데 준이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군요. 가끔 찾아와 주무시던 아저씨는 분명 준이의 아빠였는데 정작 준이는 같이 있었던 게 맞나 하는 정도입니다.
제가 일곱 살이 되어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 외갓집에 간 그 해인지 그 다음 해인지 여름방학에 그 산골 마을을 갔던 것도 기억합니다. 마을 아이들이 현이 왔다고 반가와 했고, 그 때는 분명 준이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어느 겨울 방학에는 어머니가 서울에 와서 며칠 머물다 가시기도 했지요. 떠나던 전날 어머니 품에서 밤새 울었습니다.
아, 중요한 기억이 또 있군요. 어느 해 준이가 외갓집에 와 있던 일입니다. 딱 그때 한번이었어요. 어머니가 데려다 놓고 훌쩍 떠났지요. 삼촌들과 이모들이 왜인지 준이에게 차가웠습니다. 제가 준이를 때려 울리기도 했는데 헤어진 뒤 그 때린 일이 두고두고 가슴 아팠습니다. 저에게 여동생이 생겼다는 얘기도 준이로부터 들었어요.
이거 다 기억하시나요? 어머니.
기억은 상상과 동일한 두뇌 작용이라고 뇌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왜곡이 있을 것이고 어쩌면 제가 만들어낸 기억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들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소중했고 아름다웠으니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먼 기억까지 돌에 새긴 듯 간직하게 된 이유는 열 살, 국민학교 4학년 이후 긴 고통이 이어졌기 때문일 겁니다. 행복했던 기억을 되새기고 또 되새겨서 돌처럼 강화시킨 것이지요. 뇌 과학자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제가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겠지만요.
그 해, 어머니 손에 이끌려 아버지를 만났고 아버지 집에서 살게 되었고,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결코 순하지 않은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전남편 집이 어떠할 것이라고 상상하셨나요?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일주일 간 서울 외가에 보내 주었던 그 때입니다. 기억하고 계시지요? 할머니가 말씀 안하시던가요? 마침 제가 있는 동안 어머니가 서울에 오셨거든요. 저는 그때쯤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데다 사실 그리움만큼 원망도 컸습니다. 제가 설레었던 건 어머니도 어머니지만 그보다 준이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저를 데리고 집을 나와 어딘가에서 밤을 보내면서 털어놓기 전까지는요. 준이도, 제가 얼굴도 못 본 그 여동생도 그 애들의 아버지 집으로 갔다는 사실 말입니다. 어머니와 같이 오는 분은 준이 아빠가 아니었어요. 제 평생에 가장 서럽게 울었습니다.
어머니.
헤어지고 어느덧 오십 년도 더 지났군요. 여느 아이처럼 세상의 전부였던 어머니. 미치도록 보고 싶기도 용서할 수 없기도 했던 어머니. 원망이 증오가 되었어도 오래된 기억에는 기어코 아름답게 새겨야 했던 나의 어머니. 세월은 애증의 굴곡을 뒤덮으며 순식간에 흘러버렸습니다. 더 이상 어머니가 그립지 않게 된 뒤로도 긴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요, 어머니. 아들도 나이가 들어서 이제는 어머니가 새롭게 보이는군요. 제 곁의 어머니 비슷한 연세의 그분에게서 어머니가 보입니다. 텅 빈 눈에 주름살 많은 여인, 숱한 파란을 겪었고 마음 모질기도 했으나 이제는 어둠이 황혼을 밀어내는 시간을 그저 견디고 있는 여인. 제게도 황혼이 오고 뒤이어 어둠이 찾아오겠지요. 저 또한 언젠가 제가 겪은 파란도 하나씩 놓아 보내고 마침내 텅 빈 눈이 될 날이 오겠지요. 돌이켜 보면 그 많은 파도가 잔물결들이었습니다. 건강한 사회인이 되었고 반평생을 저만 바라보는 여인을 얻었습니다. 인생이란 게 뭐, 다 그런 것 아닐까요? 어머니도 저와 동생들 보낸 후 오래도록 행복하셨기를 빕니다.
한번은 만나고 싶군요. 그런데, 살아는 계신가요?
어머니.
일전에 이모님을 깜짝 놀라게 하셨다 들었습니다. 세 아들딸 중 누가 어머니 당신이 낳은 자식인지 물으셨다고요. 이모가 우셨답니다. 무슨 기억을 그렇게 놓아버리고 싶으셨나요? 그로부터 석달인가 넉달인가, 이제는 그런 의문조차 없고 제 얼굴이 허공의 한 점과 다를 바 없게 되었네요.
두 아이의 엄마가 남편의 전처소생 고집불통 꼬마와 처음 만난지 오십 년도 더 지났습니다. 그 때, 아버지 집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서 상황을 정확히 깨달은 저는 곧장 뛰쳐나갔지요. 거리를 몇 시간이나 헤매다가 이번에는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갈 수 있는 곳이 아무데도 없다는 현실 말입니다. 제가 뛰쳐나온 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난생 처음 가본 그 도시 골목들이 머리에 입력되었을 리가 없지요. 헤매다 헤매다 아버지가 저를 찾아낸 것이 그 집에서의 첫 기억입니다.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는데 제 기억으로는 어머니가 하루도 집을 나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돌이 갓 지난 젖먹이 딸 때문이었을까요?
긴 세월 저와 어머니는 서로의 존재 자체가 상처였습니다. 어른들이 매양 타박했듯이 저는 지독히도 붙임성 없는 아이였지요. 하루 종일 묻는 말에 대답하는 외에는 말도 없고 웃지도 않고, 특히나 호칭은 정말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아버지는 아빠라 했고 할머니는 할머니라 불렀지만 엄마 소리는 죽어도 입 밖으로 내놓지 못했습니다. 어른들은 저만 보면 타이르기도 혼내기도 했지만 저는 참 구제할 수 없는 불통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살가운 분은 아니었어요. 저만큼이나 다른 분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셨지요. 아주 오랫동안 어머니는 저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시고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할머니의 간단없는 폭력과 아버지의 고함 소리보다 어머니의 그 눈빛이 저는 더 힘들었습니다. 당연히 제가 힘든만큼 어머니도 힘드셨겠지요. 먹여주고 입혀 주는데 엄마 소리 한번 안 하는 저에게 참 억장 무너졌을겁니다.
어머니에게 맞은 일이 몇 번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번은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 때 상황이 어느 집에서 무슨 말을 한 것을 어머니에게 전달해야 했는데 입을 꾹 닫고 있다가 다른 경로로, 아마 “큰애한테 말했는데 왜…” 같은 식으로 알게 되셨을 때입니다. 할머니에게 혼나는 중인데 갑자기 어머니가 달려들어 저를 꼬집고 때리셨죠. 할머니에게 맞을 때만큼 아프지는 않았는데,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차라리 이게 낫다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차가운 침묵보다 공개적인 체벌이 더 마음 편했습니다. 저라고 그런 상황이 정상이었을까요? 저는 사실 어머니께 말도 못하고 다가가지도 못하는 제가 답답했습니다. 제가 다가가면 어머니의 차가운 눈빛이 누그러질까, 그런 간절한 마음은 분명 있었지만 행동으로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마치 사고로 팔다리를 못쓰는 것처럼.
어머니를 건성으로 다른 말에 묻혀서 부르지 않고 또렷하게 어머니라 처음 부른 건 제가 어머니를 만난 지 15년이나 지난 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다니기 시작했던 때였습니다. 추석 때였고요. 그걸 왜 정확히 기억하느냐면, 가슴에 뜨거운 물이 흘러 어머니를 불러놓고도 잠시 아무 일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은 그러니까, 저절로 왔습니다.
제가 맞선도 몇 번 퇴짜 놓고 집에 인사하러 데려간 아가씨와도 헤어지고 나이 30을 훌쩍 넘겼을 때 아버지가 저에게 그러셨습니다. 제가 아직 혼자라는 얘기를 듣고 어느 분이 어머니에게 “자긴 그 애한테 잘 해야 돼”, 이 말에 어머니가 몹시 속상하셨다고요. 아버지 말씀은 어머니가 할만큼 하셨다는 뜻이었는데, 굳이 말씀하실 필요 없었습니다. 제가 알거든요.
그렇습니다. 세월은 모든 것을 덮고 모난 돌도 둥글게 깎아내는 힘이 있지만 어떤 사실은 흐를수록 더 명징하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저를 아들로 인정하기 위해 긴 시간 자신과 싸우셨습니다. 제가 간절했던 만큼 어머니도 침묵의 고리를 끊고 흔한 모자간이 되고 싶으셨지요. 그게 잘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 시절의 플래시백 몇 장면을 한 바늘에 꿰면 진실이 모습을 갖춥니다. 충분히 입을만한 교복 새로 맞춰주신 일이나 외가, 즉 어머니의 친정 분들께 제가 영리하다고 말씀하신 것(아마 달래신 것이겠지요), 제가 실신할만큼 아팠을 때 약 먹여주셨던 일, 그리고 그 외 자잘한 기억들. 차가운 긴장 중간중간 그런 진심의 편린들이 그 때는 왜 보이지 않았을까요?
원망 하나 하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설날, 연휴 계획을 짜다 전화했을 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 계실 때와 똑같아야 돼.”
가슴에 찬바람이 일었습니다. 저를 믿지 못하셨나요? 혹시 두려우셨나요? 어머니와 아들로 살아온 세월이 부족하진 않았을 텐데 아직도 저에게는 어머니가 가까이 하기 어려운 벽이 있었나 봅니다. 어머니의 플래시백 속에 아들의 진심은 찾기 힘들었나 봅니다. 무엇이 되었든 제 탓이겠지만, 어머니, 그런 생각 말아 주세요.
그런데요 어머니, 차라리 그런 상상이라도 하는 어머니로 돌아오셨으면 한답니다. 어느 날부터 급속도로 잃어가는 기억, 시간과 공간이 멋대로 춤추는 세계에 어머니는 들어가셨습니다. 제게 보상이라도 하듯 며느리와 손녀에게 다정하셨으나 이제 그 기억마저 거의 놓아버리셨습니다. 지우고 싶은 기억 얼마나 많을까요. 주름살 사이 텅 빈 눈, 돌아오시지 못한다면 차라리 행복한 기억만 되살리시길 빕니다. 제가 없는 세상, 두 아이의 엄마로 평생 가장 행복했던 날들.
더 늦기 전에 평생 어머니께 한 번도 하지 못한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지금 모습으로라도 건강하게 오래만 계셔 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