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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이병현 Oct 10. 2023

2023 부산국제영화제 방문기

<바튼 아카데미>, <마른 풀에 관하여>, <클로즈 유어 아이즈> 등

1지망보다는 1.5~2지망에 가까운 영화 먼저 예매를 시도했고, 다행히 다 성공했다. 하루에 2~3편 정도만 보는 널널한 일정이었기에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1일차: <폴른 리브스>

<파리 아다망에서>와 <폴른 리브스>를 두고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폴른 리브스>를 봤다. 도착한 날 저녁부터 긴 다큐멘터리를 보다가는 잠 들 것 같아 한 결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작품으로 시작해 기분이 좋았다. 핀란드 헬싱키를 배경으로 두 남녀의 사랑을 다룬 영화였고,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는 처음 본 것인데 아주 독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양식적인 연기와 무미건조한 촬영과 편집이 더해져 감독의 다른 작품도 궁금하게 만들었다. 샷의 움직임이 그다지 많지 않아, 가끔은 이 감독이 자신이 선택한 카메라 위치에 확신이 많은 편일 것이라는 추측도 했다.

이야기도 건조한 유머와 함께 예정된 결말로 흘러가지만, 뻔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운명적 사랑의 반대급부로 운명이 떼어놓으려 애쓰지만 '우연'에 힘입어 의지로 그 운명적 이별을 막아서고 다시 마주치려는 이야기인데, 이것도 나름 분석해볼 거리가 있다.


2일차: <북두칠성>, <바튼 아카데미>

도저히 아침에 제때 일어날 자신이 없어 <푸른 장벽>을 취소하고 두 편만 봤다.


<북두칠성>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후반부까지도 인물 관계도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질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영화 잘못이라기보다는 원래 내가 배우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편이라 그런 것 같다. 사랑하는 것을 상실한 뒤 이를 극복해나가는 법을 다룬 영화라 생각했는데, 여기서 '사랑하는 것'은 연인이나 가족을 뜻하기도 하지만 인형극이나 미술처럼 형태가 없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다지 인상깊은 점은 없었다.


<바튼 아카데미>

예매할 때부터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재밌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 생각이 맞았다. 체육관 장면 이후로 모든 웃기려는 장면에서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동창에게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라든가, 체리 주빌레 장면이라든가. 이렇게 웃긴 장면 말고도 기억 나는 순간이 많은데, 특히 흘러가는 장갑을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을 담은 샷은 아주 아름다웠다. 지나가는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씩 기억에 남을 순간을 만들어주는 영화의 무드가 좋았다.

전개는 뻔한 듯하면서도 예측이 안 되는데, 각본이 천의무봉의 경지다. 이는 작중 선생 캐릭터인 '폴'이 지닌 힘 덕분이 크다.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내려주는 현인으로 묘사되는 게 아니라, 본인도 외롭고 결함을 지녀 함께 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피상적으로 묘사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신이 그어둔 선은 넘지 않는 살아있는 인물이다. 쉽게 말해 '캐붕'이 없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함께 술을 먹는 식으로 어울리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친근하고, 웃기다. 꼭 망가져야만 웃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좋은 예시다.


3일차: <클로즈 유어 아이즈>, <키아로스타미는 작업 중>, <마른 풀에 관하여>


<클로즈 유어 아이즈>

잔잔하게 흘러가는 영화다. 미스터리를 강조하지도 않고, 아픔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주인공이 1부에 벌인 일 중 딱히 실종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사건은 없다. 그러니 이 영화를 미스터리로 본다면 상당히 밋밋할 것이다.

게다가 작중 캐릭터가 상상 속에서 찍은 절벽 장면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평이할 뿐 그다지 특출나게 아름다운 장면은 없고(90년대에 찍은 걸로 설정된 옛 필름영화의 클립도 아마도 의도적으로 딱히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찍히진 않았다), 이야기도 뚜렷한 악인이나 가슴아픈 사연 같은 건 없이 흘러간다.

그러나 이것이 그 나름대로 맛이 있어서 스크린을 보며 '빛멍' 때리듯이 나른하게 볼 수 있었다.

영화는 '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마지막에 눈을 감는 모습을 기억을 되찾은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이 영화는 단순히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거나 과거의 거장에 찬사를 보내거나 영화로 기적을 이루거나 하는 따위의 내용이 아니다. 영화가 찬란하지만 덧없이 사라질 젊음을 단순히 보존하는 매체가 아니라, 그를 통해 피할 수 없는 노화와 죽음, 상실을 상기시키기도 하는 매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본질적으로 무시무시한 속성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영화의 미래를 지탱할 것은 회고어린 시선이 아니라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는 한 점의 직시라고.


'눈빛'으로 번역한 말은 영어 자막으로는 'gaze'라 번역됐는데, 부채 너머로 보내는 시선도 그렇고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그렇고 이걸 '응시'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쪽으로는 굳이 더 생각의 갈래를 뻗어나가지 않으려 한다)


<키아로스타미는 작업 중>

중간에 잤다. 몇 가지 흥미로운 비화를 제외하고는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마른 풀에 관하여>

《롤리타》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상당히 역겨운 인간의 시선에서 영화가 전개된다. 중간에 뜬금없이 세트장이 나오는 장면을 두고 해석이 분분한 모양인데, 나는 그걸 해당 장면 전체가 '페이크'라고 지시하는 친절한 주석이라고 봤다. 어쨌든 마지막 장면의 내레이션은 주인공이 중학생을 사랑했다는 것을 상당히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인간이 소아성애자라는 것은 영화 전반적으로 깔린 꺼림칙한 암시를 떠나서라도 꽤나 명확해보인다. 그런데 그 와중에 주인공은 (친구에 대한 일종의 치졸한 질투와 복수심 때문에) 한 성인여성과 섹스를 하는데, 그때 이 장면은 영화 외적으로는, 어쩌면 소아성애와 관련된 검열을 피해가기 위한 수단이며; 그러나 영화 내적으로도 충분히 성인여성과 맺는 관계가 이 인물에겐 핑계에 불과하다는 단서가 깔려있다. 그게 정말로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독은 이런 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이 긴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에서 '삼각관계' 이야기는 거의 아무런 쓸모가 없다. 플롯상 이 서사는 <더 헌트>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웠을 테지만, 이 작품은 그 대신 이런 이상한 방향을 택한 것이다.

아무튼 러닝타임이 무의미하게 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자 직접 찾아와 대화하는 장면 등 예측 범위를 벗어나 섬찟한 장면이 종종 나오는 덕분에 영화가 끝까지 동력을 잃지는 않는다.

여러 모로 한 번 더 감상하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재미가 깊어질 만한 영화다. (아마 개봉은 되지 않겠지만)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뜻밖의 지점은 이 역겹기 짝이 없는 주인공이 다소 허접한 카메라를 갖고 찍은 사진이 모두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말로는 '똥통'이라고 하며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곳을 이렇게까지 아름답게 담아낸다는 것부터 모순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여우주연상을 탔다는 것이 조금 의아하긴 하다. 이게 주연급의 분량이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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