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중학년부터 어른까지 읽을 수 있는 판타지동화입니다. 부모의 물리적 폭력은 가시화 되지만 언어폭력이나 정서적 폭력은 잘 가시화 되지 않는 것에 착안해 썼어요. 만자 정도 되니까 시간 되실 때 읽어주세요)
비밀이 하나 있어요. 우리 엄마는 눈의 여왕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을 읽다가 알게 되었어요. 책 속에서 눈의 여왕은 차가운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지요.
눈의 여왕이 카이의 입에 숨결을 불어넣자 차가운 기운이 들어가며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었어요. 눈의 여왕 입에서는 차가운 얼음들이 쏟아져 나왔고 눈빛도 얼굴도 얼음처럼 차가왔죠.
엄마의 입에서도 얼음들과 함께 그렇게 차가운 말들이 자주 흘러나왔어요. 나는 엄마의 말들을 들으면 가슴이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이 들곤 했어요. 때로는 얼음 송곳으로 찔리는 것처럼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요. 그러니 엄마는 틀림없이 눈의 여왕인 거예요.
나는 엄마가 눈의 여왕이라는 걸 알게 되자 그동안 엄마가 내게 왜 그랬나를 알아 속이 시원했어요. 엄마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내가 미워서 그런 말들을 한 게 아니었어요. 그냥 엄마는 눈의 여왕이니까 그런 것이지요.
그뒤로 나는 엄마가 내게 무슨 말을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요. 그냥 다 눈의 여왕의 얼음창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지요. 하지만 그래도 맞으면 아프고 차가운 건 여전했어요.
나는 계속 괴로웠어요. 차라리 나도 카이처럼 심장이 얼어붙게 되면 좋을 텐데 생각했지요. 나도 눈의 여왕이 되버리고 싶었어요. 무엇에도 마음이 아프지 않게.
11살이 된 나는 여전히 엄마가 눈의 여왕이라고 믿고 있어요. 다른 사람 같으면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가 어딨냐고 하겠지만 나는 확실히 믿을 수밖에 없어요. 엄마가 내게 말을 할 때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얼음들이 똑똑히 보이기 때문이지요.
요즘은 예전보다 더 엄마가 눈의 여왕이 될 때가 많아서 나는 항상 마음 속에 방패를 가지고 심장을 보호하는 상상을 해요. 그러면 신기하게도 엄마의 차가운 말이 주는 아픔이 조금은 덜 한 기분이 들어요.
오늘은 엄마의 얼음창 말고 두 번째로 이상한 걸 본 날이에요. 집을 가고 있는데 눈앞에 초록색 모자를 쓴 난쟁이가 보였어요. 무서웠던 나는 애써 못 본체 하고 지나가려고 했지만 그 난쟁이는 내앞을 가로막고 말했어요.
“눈의 여왕의 후계자시여, 제발 이 세상에 새로 눈의 여왕이 탄생하는 걸 막는데 도움을 주십시오.”
놀란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리기를 해서 도망갔어요. 한참을 달리고 나서 나니 이제 아무런 모습도 보이지 않았지요.
‘요즘 시험 때문에 마음도 불안하고 엄마 때문에도 내가 잠시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 이상한 게 보였나봐.’
나는 애써 마음을 다독거리면서 숨을 헉헉 내쉬었지요. 하지만 그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어요.
학교에 있든 집에 가든 그 초록색 난쟁이는 조금 마음을 놓을 만하면 나타나서 그 눈의 여왕이 뭐라하는 말을 하면서 내게 애원했어요. 그때마다 눈도 안 마주치고 자리를 피했지만 내 방에서 갑자기 나타날 때면 어디로 갈 때도 없고 너무 곤란했지요.
그럴 땐 그냥 눈을 감고 숫자를 셋어요.
‘나는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다, 여긴 해리 포터의 세계가 아니다.’
별의별 말을 속으로 다 하면서 난쟁이가 없어지길 기다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눈을 뜨면 사라져있곤 했지요.
견디다 못한 나는 난쟁이와 한번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난쟁이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나타났지요.
“눈의 여왕의 후계자시여, 제발 다음번 눈의 여왕의 탄생을 막아주십시오.”
“그래 알겠어. 네가 원하는 걸 알겠다고. 근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당신의 어머니는 눈의 여왕이며 당신은 다음번 눈의 여왕입니다. 눈의 여왕들은 이 세상에 한명이 아니고 아주 많아요. 어린 시절부터 훈련을 시켜서 눈의 여왕으로 만드는 거지요. 대개 그 훈련에 져서 눈의 여왕이 되버립니다. 이번 대에선 당신만이 아직 심장이 얼어붙지 않았어요. 눈의 여왕이 한명이라도 줄어들어야 우리 세계의 얼음이 줄어듭니다. 당신들의 세계와 우리들의 세계는 이어져 있거든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저와 함께 눈의 여왕의 공격에 대항하는 훈련을 하면 됩니다.”
“흠, 날 도와주겠다는 거지?”
“네, 당신은 굉장히 용감하고 강한 분입니다. 눈의 여왕의 딸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남은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 놀랐어요. 누군가에게 내가 살아있는 것 자체를 칭찬받다니 정말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이상한 느낌이었지요. 어떤지 울고 싶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입을 다물고 조금 눈물이 배인 눈으로 초록색의 난쟁이를 조용히 쳐다보았지요.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도대체 넌 누구야?”
“저는 눈의 여왕의 세계에서 온 난쟁이입니다. 예전에는 눈의 여왕이 이 세상에 이렇게 많지가 않았어요. 적당해서 얼음과 봄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이 세계에 눈의 여왕이 많아지면서 우리 세계는 얼어붙기 시작했답니다. 우리들은 그걸 막기 위해 눈의 여왕의 후계자들을 찾아오기 시작했지요. 제 이름은 루아입니다. 그렇게 불러주세요.”
나는 이제 이 눈앞의 초록 난쟁이를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게다가 날 도와주겠다고 하잖아요? 세상에 태어나서 날 도와준 사람은 여태까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럼 그 훈련이라는 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마법을 훈련하면 됩니다.”
“마법? 마법이라고?”
나는 어리둥절해서 큰 소리로 되물었어요. 초록 난쟁이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마법까지는 좀 무리였거든요.
“마법이라고 해서 아주 대단한 건 아닙니다. 이 세계에서 마법이란 건 상상력과 말로 이루어져 있어요. 다만 그걸 마법력으로 바꿔서 쓸 줄을 모르는 것 뿐이죠.”
상상력이라. 그건 내가 좀 자신 있는 분야이기는 했어요. 언제나 머릿속으로 이곳이 아니고 다른 곳에 살고 싶어서 상상하곤 했거든요.
“상상력을 마법력으로 어떻게 바꿔야 하는데?”
“그걸 지금부터 제가 당신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죠?”
나는 어쩐지 이름을 쉽게 가르쳐주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름 알아서 뭐할 건데?”
“서로 이름을 알아야 신뢰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제게 당신의 마법 선생이 될 예정이니 제자의 이름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긍이 가지 않는 말은 아니었어요.
“내 이름은 오은수야.”
“그럼 은수님 지금부터 저와 함께 당신의 상상력을 마법력으로 바꾸는 훈련을 시작하기로 하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음... 동의해.”
초록 난쟁이는 빙긋 웃더니 내게 작은 손을 내밀었어요.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어요. 촉촉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요.
나는 학교에서도 다른 학생들이랑 이야기를 하지 않고 책만 봤어요. 그래도 외롭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이 아이가 나타나는 게 처음만큼 불쾌하지 않고 기다려지게도 되고 심지어 어떨 땐 반갑기도 했어요.
내가 태어나서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친구’가 이런 느낌일까 싶었어요. 하지만 아직 그런 이름을 붙여주기는 싫었어요. 초록 난쟁이가 말하긴 마법은 상상력과 말에 있다고 했잖아요. ‘친구’라는 말에는 마법력이 있을지 어떻게 알아요? 나중에 나중에 그렇게 말해줄 거예요.
“이제부터 눈의 여왕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마법력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은수님이 이미 전부터 이 마법을 쓰고 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의 여왕이 되지 않은 것이고요.”
나는 마법의 마,자도 잘 알지 못 했기 때문에 초록 난쟁이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어요.
“아니, 난 마법 같은 거 할 줄 몰라.”
“아까 제가 마법이 뭐라고 했죠?”
“상상력과 말”
“은수님은 어머니께서 얼음의 말을 쏟아낼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 방패로 심장을 보호하는 상상을 했어!”
“바로 그겁니다. 은수님이 상상한 심장 보호 방패에는 실제로 힘이 있었던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심장이 완전히 얼어붙지 않은 것이지요. 전에도 말했지만 은수님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배우지 않고서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부터는 그 심장 보호 방패가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거라고 믿도록 노력해봅니다. 모양도 자세히 생각해보고요. 그리고 한번 그려보세요. 마법력을 실체화하는 데는 그림도 큰 힘이 됩니다.”
나는 초록 난쟁이의 말을 듣고 왠지 신이 나서 스케치북을 꺼냈어요. 여태까지 내가 나도 모르게 마법을 쓰고 있었다니 뭔가 기특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난쟁이가 자꾸 칭찬을 하는 것도 듣기 좋았어요. 처음에는 듣기 좀 간지럽더니 계속 들으니까 마음에 힘이 되더라고요.
나는 스케치북에 내 심장을 보호해줄 방패를 최대한 자세하게 그렸어요. 조금 멋있게 그리고 싶어서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그리고 싶었는데 초록 난쟁이가 말렸어요. 그냥 자신의 마음속에 지금 있는 방패 모양이 제일 강한 거래요. 그래서 갈색의 테두리를 가진 평범한 방패를 그리곤 말았지요. 하지만 내 마음에는 들었어요.
“이 그림을 벽에 붙여두고 자주 보세요. 그리고 어머니가 공격을 시작하면 방패로 심장을 보호하는 상상을 강하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계속 할수록 방패의 효과가 커질 것입니다.”
심장 보호 방패를 써먹는 날은 역시 빨리 왔어요. 엄마는 회사에서 돌아오자마자 또 내게 차가운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지요.
“은수 너 내가 집안정리 좀 똑바로 해놓으라고 했지? 엄마는 힘들게 일하는데 그런 것도 못해?”
이런 사소한 일이 시작이었어요. 그러면서 그동안 엄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내 행동들에 대해 날 깎아내리기 시작하지요. 아주 예전에는 그런 말들을 들으면 그게 사실인줄 알고 엄마에게 미안해했지요.
하지만 좀 자라서는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 그냥 엄마의 화풀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때부터는 한 귀로 듣고 흘리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그리고 오늘! 나는 초록 난쟁이와 함께 연습한 심장 보호 방패를 사용하기로 했어요. 우선 먼저 그림으로 그렸던 심장 보호 방패를 머릿속으로 열심히 생각했어요. 엄마는 여전히 눈앞에서 얼음을 엄청 내뿜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 방패를 내 심장 앞에 두는 상상을 했어요. 크고 튼튼한 방패였지요.
전에는 방패를 상상해도 그냥 좀 덜 괴로운 정도였는데 지금은 방패 앞에서 엄마의 얼음들이 막혀서 흩어지는 게 보였어요! 방패가 정말 잘 막아주고 있는 거였지요. 나는 너무 신기하고 기뻤어요. 왜냐하면 이제 엄마의 말들 때문에 밤에 혼자 눈물 흘리고 속상할 일이 적어졌거든요.
가슴 아픈 말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마음에 남는 가시 같아요. 엄마의 말은 얼음 가시처럼 내 심장에 남아서 내 심장마저도 얼어붙게 만들려고 했어요. 물론 내가 그걸 이렇게 막아내고 있지만 그동안 힘들지 않았던 건 아니지요.
어쩔 땐 차라리 엄머가 나를 때리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러면 어딘가에 신고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차가운 말도 때리는 것만큼 사람을 아프게 하는데 나는 기억하는 한 어릴 때부터 엄마한테 말로 항상 얻어 맞아왔어요. 그러다가 얼음으로까지 공격 당하고.
내가 심장 보호 방패를 세워두고 방패에만 집중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엄마의 말은 멈춰있었어요. 이렇게 마음의 상처기 별로 없이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본 건 처음이었어요. 앞으로는 이러면 되겠구나 싶으니까 저절로 안심이 되더라고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세상이 조금은 안전하게 느껴졌어요.
‘나는 나를 지킬 수 있어!’
라는 말을 속으로 계속 했어요. 무언가 점점 든든해지는 느낌이 들었지요.
엄마에게서 공격당하고 있을 땐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초록 난쟁이가 그날밤 내앞에 나타났어요.
“정말 잘 하셨습니다. 은수님. 이제 상한 심장 자체를 강하게 만드는 수련을 하겠습니다. 아무리 심장을 완벽하게 보호해도 심장이 얼어버려 있으면 소용이 없으니까요.”
“심장을 강하게 만든다고? 그게 가능해?”
나는 귀가 솔깃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마법은 상상력과 말이라고 말씀드렸죠. 심장은 말의 힘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어떤 말?”
“은수님 자기 자신을 칭찬을 해본 적이 혹시 있나요?”
나는 한번 되돌아봤어. 초록 난쟁이를 만나기 전에는 나를 칭찬한다는 생각 따위 해본적이 없었지요.
“너 만나고 조금 해봤지. 전에는 그런 적 없었어.”
“얼어버리거나 상한 심장을 되살리려면 봄바람처럼 따듯한 자신에 대한 칭찬이 필요합니다. 남에게 듣는다면 더 좋겠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지요. 저는 항상 은수님을 칭찬하고 인정하고 있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고요. 은수님 스스로 자신이 하는 작은 일부터 칭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에 환한 불을 켜듯 심장이 조금씩 따뜻해질 거예요.”
나는 무슨 말인지 알듯 모를 듯 했어.
“난 근데 그렇게 칭찬할 만한 좋은 일을 하지 않는걸. 그냥 학교 다니는 학생일 뿐이야.”
“그게 바로 자신을 칭찬할 만한 일 중 하나죠. 매일 아침 힘든데도 일어나서 학교를 빠지지 않고 가잖아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앞으로는 학교에 갈 때마다 ‘학교를 빠지지 않다니 나는 대단하다!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또 은수님이 매일 밥을 먹잖아요? 밥 먹는 것도 귀찮은데 빠지지 않고 먹다니 잘 한 일이죠. 은수님 일상의 모든 일들, 잠자기, 세수하기, 밥 먹기 등이 다 잘 하고 있고 칭찬받을 일이랍니다.”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일이라 좀 어리둥절했어요. 하지만 초록 난쟁이 말대로 생각해보니 조금 심장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나는 항상 엄마 말대로 밥만 축내고, 공부도 못 하는 쓸모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진짜 ‘엄마 말’인 거였어요. 내 말이 아니라.
앞으로는 ‘내 말’로 내 심장을 채워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엄마 말’은 계속 쫓아내면서.
‘그래, 지금 날 칭찬할 건 일기를 빼먹지 않고 쓴 거다! 참 잘 했어요!’
엄마의 얼음공격은 계속 되었지만 나는 이제 막아낼 방패도 있고 심장을 녹이는 마법의 말도 알고 있기 때문에 큰 걱정이 없었어요. 그래도 가끔 마음이 아플 때도 있긴 했지만 예전보다는 빨리 나아졌어요.
그래서 나는 이제 초록난쟁이가 내게 해줄 게 더 이상 없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섭섭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내 생각과 달리 초록 난쟁이는 또 나타났어요.
“은수님 정말 잘 하고 계십니다. 이제 제가 은수님에게 마지막으로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바로 봄의 말과 불의 말이지요,”
나는 또 갑자기 나타난 초록 난쟁이에게 깜짝 놀랐지만 은근히 반가웠어요.
“그건 또 뭐야?”
“어머니꼐서는 얼음의 속성의 마법말을 쓰고 계시죠. 그것에 맞서기 위해서는 봄과 불의 속성의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엄마에게 맞서다니! 나는 여태까지 감히 생각도 못해본 일이었어요. 아빠가 일찍 돌아가시고 나를 키우기 위해 힘든 일이 많은 엄마였어요. 나만 없었으면 엄마는 힘들지 않았을 거 같아서 나는 엄마가 아무리 내게 뭐라고 해도 입도 뻥긋 하지 못했어요. 마음이 아파도 그냥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내가 엄마에게 맞서도 될까? 엄마는 엄마잖아.”
“그렇죠. 엄마는 엄마죠. 하지만 아이에게 엄마는 엄마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은수님에게 하는 건 옳지 않아요. 은수님도 이제 11살이나 되었으니 엄마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힘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동안 키우지 못해서 그렇지.”
“그런 힘은 어떻게 키워?”
“은수님이 그동안 어머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쭈욱 적어보세요. 그리고 계속 읽는 걸 반복하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종이 위에 글에서 희미하게 봄의 빛이나 불빛이 보이는 때가 올 거예요. 그때가 완성되었을 때입니다.”
초록난쟁이가 가고 나서 나는 스케치북을 뜯어서 내가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보려고 했어요. 근데 머리가 하얀 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거에요. 여태까지 엄마에게 말을 하려는 생각조차 안 해봤거든요.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눈을 감고 내게 얼음화살을 쏘아대는 엄마를 상상했어요. 금방 엄마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지요. 그리고 그때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생각했어요.
‘엄마...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맨 처음 생각난 게 이 말이었어요. 엄마는 항상 내 잘못이 아닌 일로 나를 혼냈거든요. 너무 억울했어요. 하나를 생각했더니 나머지도 또 생각났어요.
‘엄마 나한테 소리 지르지 마!’
나는 이렇게 계속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하나씩 하나씩 써나갔어요.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요. 왠지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했어요. 이렇게라도 하고 싶었던 말을 하니까 좋기도 했어요. 나는 정말 마음속에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더라고요.
빡빡하게 쓰인 종이를 나는 그날부터 매일매일 열심히 읽었어요. 그랬더니 진짜 어느날부터 종이에서 조금씩 빛이 나더라고요. 빛은 처음에는 약했지만 내가 계속 열심히 읽을수록 강해졌어요. 하두 많이 읽었더니 종이 위에 적은 말들은 다 외울 정도였지요.
“이제 큰 대결을 할 때가 다가온 것 같습니다.”
“엣, 뭐라고?”
“은수님이 봄의 빛과 불의 말을 가지게 되었으니 충분히 어머니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간단합니다. 어머니가 얼음의 말을 하면 은수님은 지금까지 외운 봄과 불의 말을 해주면 됩니다. 그러면 은수님 입에서 불의 기운이 나오는 걸 볼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아직 자신이 없어. 그리고 엄마를 공격하기도 싫고.”
초록 난쟁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어요.
“그럼 당장은 미뤄두도록 하죠. 하지만 조만간 은수님도 참을 수 없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지요.
그날도 엄마는 또 별것도 아닌 일로 내게 화가 나서 차가운 소리를 퍼붓기 시작했지요. 나는 얼른 심장보호방패를 하고 심호흡을 했지만 오늘따라 엄마의 공격은 오래 가고 셌어요. 방패가 있더라도 내 심장이 조금씩 차갑게 얼어붙는 게 느껴질 정도였지요.
‘할 수 없다. 나는 참을 만큼 참았어.“
이런 생각을 하고 외운 말 중에서 제일 약한 걸 해봤어요.
“엄마, 제발 그만해.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내가 이 말을 하자 입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나가는 게 느껴졌어. 엄마는 내 말을 듣자 놀라서 멈칫 했지요. 여태까지 내가 엄마에게 혼날 때 말대꾸를 해 본적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그것도 잠깐 더 센 공격을 하기 시작했어요. 너무 차갑고 차가워서 심장 보호 방패가 없었다면 단번에 얼음인형이 될 법한 말들이였어요. 나도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어요. 나도 살아야하니까요.
“엄마 나한테 화내지 마! 난 잘못한 거 없어. 화풀이라는 거 알아”
이번엔 입에서 뜨거운 불의 기운이 나가는 게 느껴졌지요. 엄마는 심장에 공격을 받은 듯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어요. 그다음부터는 똑같아요. 엄마가 차가운 말을 하고 내가 불의 말을 하고 계속 반복이었지요. 계속 그러다가 엄마가 내게 말했어요.
“이제 그만 하자. 엄마가 너무 힘들구나.”
정말 오랜만에 엄마 입에서 차가운 얼음이 나오지 않는 말을 봤어요.
“그럼 엄마 앞으로 말 좀 가려서 해. 난 엄마 화 쏟아내는 데가 아니라고.”
엄마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터벅터벅 자기 방으로 들어갔어요. 무언가 이긴 거 같긴 한데 이긴 기분은 들지 않았지요.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실컷 했어요. 그래서 기분이 시원하면서도 이상했지요. 사람이 안 하던 일을 하면 그런가봐요.
그뒤로 엄마가 차가운 말을 안 했다면 정말 완벽했겠지요. 그렇지만 엄마는 계속 내게 그랬어요. 아, 아니다. 아주 조금은 강도나 빈도가 줄어든 거 같기도 한 거 같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요.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나는 이제 예전처럼 맥없이 당하진 않잖아요? 내겐 상상력으로 만든 심장보호방패도 있고 말의 힘으로 된 무기도 있어요. 그리고 심장을 살리는 칭찬의 말도 이제 매일 해 주고 있고. 내 심장은 끄덕 없어요. 얼어붙지 않아요. 눈의 여왕이 되지 않아요.
어느날밤 자기 전에 잠시 생각한 게 있어요. 엄마는 왜 눈의 여왕이 되었는지. 아마 엄마도 자기 엄마한테 계속 차가운 말로 공격을 받아 눈의 여왕이 된 거겠지? 그렇다고 내가 뭐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아주 잠시 안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래도 내게 잘못한 건 잘못한 것이지만.
초록색 난쟁이 아로는 이제는 다시 내 눈에 보이지 않아요. 매일매일 보이더니 며칠이 지나도 안 나타나서 “난쟁아?” 하고 부르다가 처음으로 “아로야?” 하고 이름까지 낯간지럽게 불러봤지만 어디서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가끔은 이상하게 그 못생긴 초록색 얼굴이 보고 싶기도 해요.
도대체 아로는 누구였을까? 아로가 내게 남긴 마법의 힘은 확실하니 환상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일이에요.
이제 내 이야기는 여기에서 일단 끝이에요. 나는 아마 앞으로도 게속 엄마와 전투를 하겠지요. 하지만 겁나지 않아요. 왜냐면 이제 나는 강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