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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Aug 13. 2023

동유럽의 이방인

사람 일은 모르잖아요


"실수했어도 끝까지 했어야죠. 사람 일은 모르잖아요."


동유럽의 꽃, 체코의 한 작은 마을에서 열린 체스 대회. 첫 경기를 허무하게 지고 나온 내게 코치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경기 시간은 평균 3시간이 넘을 정도로 넉넉했고, 많은 시간을 수읽기에 쏟으면서 어떻게든 무승부를 만들어볼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작은 실수 하나에 멘탈이 흔들린 나는, 곧장 기권을 선언하고 경기장을 나와버렸다. 물론 경기를 이어나갔어도 질 확률이 높았고, 코치도 이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가 강조한 건 경기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는 실수를 만회하는 과정에서 길러지는 능력이 따로 있다고 했다. '체크메이트'를 당하지 않기 위해 촘촘하게 수비벽을 쌓고, 차분히 역전의 발판을 다지는 능력은 훗날 이기는 상황에서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어쨌든 엎질러진 물이니 남은 경기에서 잘해보시고. 일단 맥주나 마시러 갑시다." 밤이 더 늦기 전에 우린 광장으로 향했다.


전 세계에서 1인당 맥주 소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답게, 맥주는 싸고 맛있었다. 여행지에서의 설렘이 더해진 탓인지 한국에서보다 더 빨리 취기가 올라왔다. 하지만 자정 무렵 우리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한 건 취기가 아니었다. 한여름에도 체코의 밤은 한국의 늦가을처럼 쌀쌀했다. 대화의 맥이 끊겼고, 우린 그것이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자는 암묵적인 합의라는 걸 알았다. 내가 잡은 숙소는 식당에서부터 5분 정도 떨어진 외진 골목 안 쪽에 위치해 있었다. 희미한 불을 내뿜는 가로등이 드문드문 설치돼있어 거리의 분위기를 한층 더 스산하게 만들었다. 호텔은 3층짜리 건물 2동이 나란히 붙어있었는데, 내 방은 그중 손님이 한 명도 묵지 않는 동의 꼭대기에 있었다. 한밤중 마주한 엔틱한 건물 외관은 흡사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건물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열쇠를 왼쪽으로 돌려도, 오른쪽으로 돌려도 나무로 된 방문은 도무지 열리지 않았다. 잠금장치가 딸깍이며 넘어가는 소리는 들렸는데, 문고리를 위아래로 잡아채봐도 뭔가가 걸린 듯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복도의 불이 켜지지 않아 휴대폰 불빛이 없으면 내 손바닥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오랜 추위에 몸은 으슬으슬 떨렸고, 취기는 오를 대로 올라 얼른 침대에 눕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 리셉션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부른다고 곧장 나올지도 알 수 없었다. 문 뒤에 짐이 걸린 듯했다. 문을 좀 더 세게 밀어봤다. 조금 더 세게, 조금 더 세게. 그때 '우직'하는 소리와 함께 문틀 주변 나무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자세히 보니 래치를 잡아주는 금속 부분이 휘어 있었다. 일단 방 안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았다.


흩어진 나뭇조각을 모아 틈에 맞춰봤다. 다행히 복구가 불가능한 수준은 아닌 듯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기도 잠시, 아늑한 방에 들어서니 졸음이 몰려왔다. 내일 생각하자, 어떻게든 되겠지. 베개에 머리를 대기 무섭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호텔 1층 식당에서 빵과 치즈를 먹고 막 일어났을 때 호텔 주인과 맞닥트렸다. 키는 작았지만 몸이 다부지고, 독수리 눈썹 때문에 인상이 험악해보이는 할아버지였다. 방문을 부수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는 영어를 못했다. 그를 데리고 방으로 올라갔다. 부서진 문을 본 할아버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한참 동안 문을 바라보던 주인은 짧은 영어로 '말도 안 돼'를 연신 외치며 자신의 사무실 겸 숙소로 돌아가버렸다.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인터넷 번역기를 켜고 범행 경위를 장문의 편지에 담았다. 할아버지가 전날의 상황을 이해해주길 바라며.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속 주인공이 된 심정이었다. 해변가에서 만난 아랍인을 총으로 쏜 주인공은 재판에서 "햇빛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판사와 배심원들은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건, 모든 감각을 열고 현장을 체험한 주인공뿐이었다. 판사와 배심원들은 그 자리에 없었고, 상상에만 의존한 그들은 중요한 논리적 연결고리를 놓치고 말았다. 이렇듯 누구나 타인의 삶에 관해선 이방인이 되며, 한 사람의 행위를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된다. 나도 결국 호텔 할아버지를 납득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는 여전히 '말도 안 돼'를 반복하며, 있는 힘껏 사무실 문을 닫았다.


단단히 화가 난 할아버지를 뒤로 하고 두 번째 체스 경기를 치르기 위해 대회장으로 향했다. 경기 상대는 공교롭게도 험상궂게 생긴 또 다른 체코 할아버지였다. 경기 내내 호텔 주인의 실망한 얼굴이 아른거려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중요한 순간, 한 번 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경기를 포기하고 호텔로 돌아가 쉬어야겠단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전날 코치의 말이 떠올라 조금만 더 버텨보기로 했다. 많은 시간을 쏟아 수비벽을 더 견고하게 쌓아올리고, 중간중간 작은 함정을 파 역전의 기회를 노렸다. 자신만만하게 수를 던지던 할아버지는 공격이 잇따라 막히자 흔들렸다. 그러다 엔드게임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할아버지는 실수를 깨닫자마자 기권을 선언하고 악수를 청했다. 그렇게 허무한 패배로 끝날 뻔했던 경기는 극적인 역전승으로 마무리됐다.


방으로 올라갈 때마다 주인장 할아버지와 마주칠까 조마조마했다. 어쩌다 마주칠 때면 온몸으로 죄송함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다시 한번 편지를 써 1층 데스크에 올려놨지만, 다음날 편지는 영수증 틈에 버려져 있었다. 첫 승리 이후 체스 대회에선 연전 연승하며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할아버지의 냉담한 시선은 좀처럼 누그러들지 않았다. 숨 막히는 일주일이 지나고, 체크아웃을 하루 앞둔 날이 됐다. 평소처럼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갔는데, 할아버지가 야외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문 수리비를 물어내겠다"고 말했다. 그는 카드 기기에 체코 돈으로 숫자를 입력했다. 일주일 숙소비를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말없이 카드를 건넸다. 결제가 끝나자 그는 번역기에 체코어로 "이건 너와 수리업자 사이의 문제였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 톤이 조금은 누그러진 듯했다.


"이거 봐요. 포기를 안 하니 질 게임도 막 뒤집고 그러잖아요." 6승 1무 2패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으로 대회를 끝마친 내게 코치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모종의 뿌듯함도 감돌았다. 체스 오프닝을 공부하지 않았기에 초반에 실수를 저지른 경기가 많았다. 하지만 실수를 만회하려고 끈질기게 노력했을 때 경기를 뒤집을 기회는 반드시 찾아왔다. 체스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었다. 끝날 때까진 아무도 그 결과를 예단할 수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 자꾸 떠올랐다. 물론 수리비를 물어내고 상관없는 일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정말 할아버지의 마음이 누그러지길 바랐다. 호텔 예약 사이트에 들어가 장문의 후기를 남겼다. 호텔에 큰 피해를 입혔는데, 주인장은 좋은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줬고, 덕분에 일주일 머무르는 동안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로 리뷰를 끝냈다. 이튿날 리뷰에는 "좋은 경험을 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또 뵙게 날을 기다리겠습니다"라는 형식적인 댓글이 달렸다.


"수리비 물어냈으면 된 거 아닌가요?" 코치가 삼겹살을 뒤집으며 말했다. 어차피 다시 볼 사람도 아니고, 그동안 마음고생도 많이 했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눈치였다. 그의 말처럼 다시는 호텔에 갈 일이 없었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말 일이었다. 이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이미 떠난 사람에게 다시 마음을 열어줄 가능성도 희박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면 제 마음도 아린 법이다. 호텔 할아버지가 내 행동이 악의적이지 않았다는 걸 이해하고 진심으로 화가 풀어지길 바랐다. 그래야 나 또한 그런 나쁜 본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내 자신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 듯했다. 궁금한 얼굴을 나를 바라보는 코치에게 답했다. "그렇지만 끝까지 해봐야죠. 사람 일은 모르잖아요." 코치는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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