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4월 말, 경기도 광주시의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승합차 한 대가 전복되고, 승용차 한 대는 반파됐다. 전복된 승합차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승용차 운전자는 다행히 살아서 차 밖으로 나왔다. 도로에 앉은 운전자는 숨을 헐떡이며 "허리가 너무 아프다"고 주변에 외쳤다. 구급차들이 현장에 속속 도착했다. 멀쩡히 말을 하던 그가 죽으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몇 분 뒤 사망한 채 발견됐다. 사고 충격 때문은 아니었다.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역주행까지 감행하며 차를 견인하러 몰려든 사설 견인차 5대 중 한 대에 치인 거였다. 그는 살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던 바로 그 순간 목숨을 잃었다.
안타까운 사연은 석 달이 지나서야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견인차 운전자가 자신의 차와 숨진 운전자 차의 블랙박스를 들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다행히 견인차주의 범행 장면은 현장에 있었던 구급차 블랙박스에 고스란히 담겼고, 곧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 죄로 재판을 받고 있다.
댓글창에는 '렉카'라고 불리는 견인차량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했다. 사고가 날 때마다 불법 경광등을 울리며 역주행과 중앙선 침범을 일삼는 도로 위 무법자들을 엄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한 네티즌은 매년 이런 뉴스가 반복돼서 나오는데 법은 왜 안 만들어지는지 모르겠다고 댓글을 달았다. 역대 법안을 찾아보니 정말 견인차의 난폭운전을 막는 법안이 없었다. 생계를 위해선 위험 운전을 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과 그걸 막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 부당하다고 느껴졌다. 기사를 써서 법제화까지 이끌어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국회의원실과 협업해 경찰, 소방으로부터 자료를 받았다. 광주지역의 견인차주들에게 무작정 전화를 돌려 견인차 운전자의 이름을 알아냈다. 이를 토대로 피해자의 변호사를 수소문했고, 변호사의 중재를 통해 유족 중 한 분과 접촉할 수 있었다. 유족은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유족들은 사과보다 합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가해 운전자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다만 얼굴과 목소리가 나가는 건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함께 인터뷰를 요청한 방송사들 대신 우리 신문사와 진행하겠다고 했다.
늦은 밤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면 목소리는 밝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여리고 가늘었다. 장례를 치른 지 석 달이 넘었는데도 그랬다. 여전히 힘든 상황에서 용기를 낸 유족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꼭 바꾸겠다" "법이 반드시 만들어지게 하겠다"는 약속뿐이었다. 실제로 법안을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국회의원과 함께 기획기사를 준비했고, 전 국민이 공감하는 문제였기에 기사를 통해 바꿀 수 있겠다는 확신 같은 게 있었다. 유족들도 그 약속을 믿고 고인의 사진과 실명을 써도 된다고 허락했다.
발행된 기사는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댓글이 수백 개는 달리겠지 생각했는데(댓글은 조회수를 가늠하는 척도다) 100개도 달리지 않고 관심이 뚝 끊겼다. 개인적으론 제목이 약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어렵게 실명 인터뷰를 따냈고, 안타까운 사고의 진상을 낱낱이 파헤쳤는데 제목은 두루뭉술하게 뽑혔다. 유족 분들을 통해 가족을 먼저 생각하던 고인의 애틋한 사연을 담았지만 기사 수정 과정에서 빠져버렸다.
취재의 완결성과는 상관없이, 내 기사는 독자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못했고, '어그로'에 실패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공감하고 분노할 수 있는 일에 반응한다. 대중의 반응이 뜨거울 때 정부와 국회가 움직이고 세상이 변한다. 어그로와 황색 저널리즘을멀리하고 정도(正道)를 걷겠다는 신문의 의지는 존중하나, 여느 때보다 많은 언론사들이 앞다퉈 자극적인 제목을 쏟아내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무언가를 바꿀 수 있기는 하나, 의구심도 든다. 언론이 사채업자처럼 의원실을 쪼아가며 법안을 만들던 시대도 지났는데 말이다. 유족들은 고맙다는 말을 전해왔지만, 미안했다. 디씨인사이드 같은 사이트에 직접 퍼 나르고 싶다는 충동도 들었다.
참고로 위 기사가 나간 날 우리 홈페이지 조회수 1위 기사는 '경사도 걷기'를 통해 1년 만에 48kg을 감량한 영국 여성에 관한 닷컴 기사였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서 아무런 대가 없이 속 깊은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취재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언론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의 그들의 입을 열 수 있는 건 자신의 선택으로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정의감 같은 감정들이다. 그래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약속은 취재원들의 마음을 여는 열쇠가 된다. 그동안 내가 취재원에게 들먹인 약속도 공허한 울림으로 끝난 경우가 많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열패감, 학습된 실패 같은 게 생긴다. 열심히 이야기 들어봐야, 문제를 꼼꼼히 지적해 봐야 어그로를 못 끌고 묻힐 텐데 굳이 이들을 힘들게 할 필요가 없지 않나. 남들처럼 똑같이 써 넘기고 '오늘도 지면 잘 막았다 고생했다' 손바닥 툭툭 털면 그만 아닌가. 요즘 어떤 사안이든 비슷한 기사들만 쏟아지는 건 그런 '약속'이 얼마나 얇고 부서지기 쉬운지 몸소 깨달은 기자들이 많아서란 생각이 든다. 나도 그중 하나가 될 테지, 아마.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기사가 좋은 기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때는 어그로를 잘 끄는 유튜버들이 언론만큼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들이 범죄자의 신상을 까발리면, 여론이 모이고, 언론이 움직이고, 정부와 국회가 발 빠르게 대처했다. 강남 '롤스로이스남' 같은 사건이 그랬다. 하지만 얼마 전 '쯔양 사태'를 통해 그들이 내리치는 정의의 망치가 순식간에 둔기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 걸 보면 언론이 내줄수 없는 영역도 있다. 확률은 낮아도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며 지난한 취재를 이어가는 기자들이, 힘들인 기사가 묻혀도 오기로 다시 도전하는 기자들이 모여 하나의 방향성, 시류를 만들어낼 때 세상은 아주 조금씩 나아지는 게 아닐까, 하는 희망이 아직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