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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Dec 10. 2024

법대로 합시다

법이 상식을 앞서는 순간들


법이 상식을 앞설 때가 있다. 올봄 강원 고성을 여행할 때였다. 숙소가 해수욕장에 맞닿아있어 머리맡 발코니 창문을 열면 밤바다의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잘 수 있었다. 하루는 기분 좋게 잠을 청하려는데 난데없이 귀가 터질 듯한 둔탁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커튼을 젖혀보니 젊은 남녀 넷이 해변가에서 불꽃을 터트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고, 해수욕장 쪽으로 발코니가 나있는 숙소들이 많았기에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이었다. 밤이라 그런지 남녀들의 대화 소리가 잘 들렸다. 일행 중 한 명이 지금, 여기서 불꽃을 터트려도 괜찮은지 물었다. 옆에 있던 남자가 당당하게 답했다. “괜찮아 폐장 기간에는 불법 아니야.”


남자의 허세도 일리 있었다. 일단 10년 전 제정된 ‘해수욕장법’에 따르면 백사장에서 폭죽을 터트리는 행위는 불법이다. 적발되면 과태료가 부과된다. 문제는 폐장된 해수욕장도 이 법의 적용을 받는지 여부다. 가령 해수욕장법은 개장 기간 중 지정된 시간 외 입수를 금지하고 있는데, 폐장 기간에는 이런 제한이 모두 사라진다. 다만 무법지대가 되는 것은 아니고, 상시 입수를 허용하도록 법을 개정한 탓이다. 남자의 자신감은 이런 법의 모호함을 머금고 자라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설령 불법이 아니라 해도 ‘밤에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다분한 상식을 법으로 덮으려는 시도가 아이러니했다. 법은 상식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나.


법은 늘어나고 있다. 올 12월 기준 우리나라의 법령과 자치법규(조례·규칙·훈령·예규 등)를 합치면 15만 건이 넘는다고 한다. 20년 전에는 6만 건이 조금 넘었다니 단순 셈법으로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두 배 넘게 늘어난 것이다. 법이 늘며 법 만능주의가 생긴 건지 그 반대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어느 때보다 ‘법대로 해'를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요즘에는 교통사고가 나면 서로 안부도 묻지 않고 경찰이나 보험사를 먼저 부른 뒤 내린다고 한다. 학교폭력 사건이 나면 아이를 다그치기 전에 변호사부터 선임한다. 법대로 하면 괜히 감정을 쏟을 필요가 없다. 법대로 하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법이 최고다.


법이 적던 시대에는 매너, 에티켓 같은 걸로 불리는 상식이 중요했다. 법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인간사의 모든 영역을 규정할 순 없고, 법이 없는 곳에서 구성원들은 상식의 불문율을 만들고 따라왔다. 어렸을 때도 법의 그늘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않았나. 이를테면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선 뛰거나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 하는 것들 말이다. 이런 상식을 어기는 민폐 행위는 큰 부끄러움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합법이냐 불법이냐가 거의 유일한 판단 기준으로 자리매김하며 불법이 아닌 민폐 행위는 당당함을 얻었다. 염치라는 자정 능력이 사라진 요즘은 민폐도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런닝크루가 말썽이자 '5인 이상 달리기'를 금지시켰단 일화는 법 만능주의가 낳은 촌극 같다.


당연한 행동이 감동을 주는 지경이다. 얼마 전 장애가 있는 아파트 주민이 이사를 앞두고 이웃들에게 “그동안 장애인 주차구역을 비워주셔서 감사하다”고 편지를 남겨 감동을 선사했다고 한다. 그동안 민폐 주차족에 얼마나 마음 졸였으면 저런 감사가 나올까 싶다. 내게도 점점 그런 당연한 모습이 당연하지 않게 눈에 밟힌다. 비흡연자들이 더 많은 노래방에서 홀로 조용히 밖으로 나가 불을 당기는 이의 뒷모습. 젖은 우산을 굳이 버스 빈 옆자리에 걸지 않아 젖어버린 바지. 요즘에는 그런 모습이 왠지 모르게 감동이다. 원래 비매너가 판치는 경기일수록 스포츠맨십은 더 빛나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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