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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래빗 Jun 26. 2022

잊을 수 없는 아빠와의 '마지막 인사'

 아빠와의 이별 4주기를 맞아

아빠는 무뚝뚝하고, 무심하고, 별로 멋 부릴 줄 모르는 그저 평범한 충청도 남자처럼 보였지만, 사실 알고 보면 유머와 위트가 있고, 손재주가 매우 탁월하고,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한 남자였다. 그의 둘째 아들인 나는 아주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꿍짝이 잘 맞는 사이였다.


동물을 유난히 좋아했던 초등생 시절, 아빠는 나를 위해 시골집 마당 한편에 커다란 비둘기 집을 나무로 지어주었다. 마을에서 얻어 온 비둘기 10마리를 내 손으로 직접 비둘기 집에 넣게 했고, 먹이를 주도록 했고, 며칠 뒤 그 비둘기들이 집을 나갔다 다시 회귀하는 (그 당시 어린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장관을 직접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그 찬란한 순간은 아직도 선명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먹고살기 바쁜 시골 농촌 마을에서는 참 드문 일이었던 것 같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도 아빠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고, 대학 진학을 위해 처음으로 집을 떠났을 때, 군대에 입대했을 때, 직장에 입사했을 때도 아빠는 나의 든든한 베이스캠프였다. 하굣길, 퇴근길에 집에 전화를 하면 "요게 누구 새끼냐~" 하며 장난스럽게 전화를 받아주시던 나의 아빠... 항상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지만, 아빠의 몸 상태는 내가 대학에 진학하며 집을 떠날 때의 건강한 몸이 아니었다.  

 



아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충북대병원에서는 이미 더 이상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현재 의료 기술로는 더 이상 호전되기 어려운 상태였지만, 나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아빠를 서울의 큰 병원으로 모셨다. 참 무심한 아들이라 자책하고 후회하면서... 


하지만 세브란스에서도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갑자기 심정지가 오는 상황도 여러 번 발생했다. 통증이 너무 극심해서 진통제와 수면제를 동시에 투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아빠는 낮에도, 밤에도 24시간 수면 상태에 있었다. 극심한 통증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병원에서 출근하고, 병원으로 퇴근했다. 휴가와 조퇴를 반복하며 마음을 졸이며 아빠 곁을 지켰지만, 사실 내가 아빠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빠의 모습을 더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아빠의 얼굴만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2018년 6월 어느 날, 담당의는 가족들을 불러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하는데 아빠는 하루 종일 의식이 없이 잠든 상태였다. 이렇게 그냥 아빠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병실에서 바라본 아빠의 모습을 스케치>



며칠 뒤 새벽. 어제도 하루 종일 의식이 없던 아빠가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잠이 번쩍 깬 나는 아빠의 귀에 대고 말을 걸었다. 아빠는 내 목소리를 듣고 얇게 눈을 떴다. 


아빠! 아빠! 내 말 들려요? 
나야 나 둘째 아들

아빠는 듣고 있다고, 괜찮다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어쩌면 정말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목이 메어서, 아무 말도 하기가 힘들었다. 겨우 겨우 아빠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멈출 수가 없었다. 아빠의 환자복이 뜨거운 눈물로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아빠! 아빠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어요.
아빠 그동안 너무너무 수고했어요. 고마워 아빠

아빠! 내가 아빠 정~말 사랑해. 알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빠를 너무 좋아해. 
나도 아빠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들 도우면서 살게요. 

.......


그런데 아빠.... 
나는 지금 아빠를 보내주기가 싫어.
나는 아빠가 조금만 더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아빠는 지금까지 일만 했는데,
아빠는 너무나 고생만 했는데, 
이제는 아빠랑 같이 놀려고 했는데,
약속한 대로 제주도도 가고 싶었는데, 
왜 바보같이 일찍 떠나려고 해


아빠의 가늘게 뜬 눈가로 눈물이 흘렀고,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빠와의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 뒤 당직 중인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왔다. 진통제와 수면제를 교체하러 새로운 수액 봉지 몇 개를 가지고 왔다. 

어? 이게 왜 이렇게 남았지?


간호사는 수액이 들어가는 링거 줄을 살펴보더니, 줄이 접힌 바람에 밤새 진통제와 수면제가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죄송하다며 간호사는 급히 링거 줄을 정리한 뒤 진통제와 수면제를 다시 투여했다. 아빠는 곧 수면 상태로 돌아갔다. 아빠는 그 이후 다시 의식을 되찾지 못했고, 우리와 영영 이별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아빠가 내 곁을 떠난 지 4년이 됐다. 올해 6월은 유난히 아빠가 더 그립고 보고 싶다. 


p.s. 4년 전 새벽, 멀쩡하던 링거 줄이 접힌 사건은 아빠와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해 준 하나님의 세심한 선물이라고 나 스스로 해석하고 있다. 평생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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